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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Aug 26. 2021

<7화> 나의 첫 19금 영화

김미연 PD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TV가 놓여 있던 거실 서랍장을 열어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VHS 비디오테이프 몇 개가 보였다. 한창 홈비디오가 각 가정에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극장 상영이 끝난 영화가 그렇게 VHS 비디오테이프로 재생산되었다.


   서랍에서 발견한 VHS 비디오테이프에는 “푸른 산호초”라는 제목과 더불어 급하게 가릴 데만 가린 것 같은 금발 남녀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갑자기 손이 덜덜, 침이 꼴깍. 시계를 보며 엄마가 돌아올 시간을 재빨리 계산한 후 TV 아래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VHS 재생기에 비디오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던 꼬마가(그때는 중학교에나 가야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푸른 산호초>를 본 것이다! 혹여 <푸른 산호초>라는 영화를 모르는 분이 계실지 몰라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당시 초딩들이 유행처럼 갖고 다니던 코팅 책받침을 점령한 여신 3인방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 중 금발의 여신 브룩 실즈 님이 무려 15세 나이에 촬영한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다. 원제는 <The Blue Lagoon>이고 원제 그대로 <푸른 산호초>라는 이름으로 국내 개봉했다. 당시 엇비슷한 청불 영화들처럼 <아무도 없는 섬에서 단둘이>라든지 <푸른 무인도의 불타는 밤>같이 요상하게 제목을 바꾸지 않은 점도 지금 생각하면 쿨내 나는 포인트이긴 하다.


   아무튼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간은 ‘이 영화가 왜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거지?’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매우 별(?)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걸 이야기가 점점 전개되면서 헐……! 6학년 초딩의 입틀막이 시작되었다.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6학년 초딩에게 에멀라인(당시 실즈 언니가 맡은 역할)이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가 초경을 시작하는 장면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는지 생각해보시라. 룰루랄라 호수에서 유영하다가 갑자기 주변에 퍼진 빨간 핏물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에멀라인. 영화 <죠스>를 본 뒤 상어 트라우마가 상당하던 초딩은 그 순간 “죠스가 나타나면 어떡해!!!” 말도 안 되는 두 영화의 컬래버레이션을 상상하며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지금도 난 영화 <죠스> 때문에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이 너무 무섭다 끙.)


   서양인의 우월한 DNA를 보여주는 쭉쭉 뻗은 팔다리와 15세의 나이라 믿을 수 없는 글래머러스한 몸매라니. 저 언니는 정말 저 영화를 촬영할 때 창피했겠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홀딱 벗다니……. 


   그 와중에 이런 생각을 했던 사춘기의 나. 아무튼 그 당시 내 성교육 수준에서는 그 영화는 19금이 아니라 완전 39금에 맞먹는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푸른 산호초>가 그런 성적인 코드로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미녀 브룩 실즈와 다비드상을 연상케 하는 크리스토퍼 앳킨스가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같이 아름다운 섬에서 어떤 옷보다도 아름다운 나신으로 뛰노는 모습이 어린 나에게도 섹슈얼한 느낌보다는 아름다운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와는 무관하게 브룩 실즈는 <블루 라군>으로 매년 할리우드 최악의 영화를 뽑는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 하하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 랜달 크레이저는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밀라 요보비치가 나오는 <The Blue Lagoon 2>를 기획하는데, 그걸 보면 그도 (나처럼) <푸른 산호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보면 어차피 누구나 언젠가는 19금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되는 순간이 오는데 그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뿐이고, 그 영화가 <푸른 산호초>다는 게 뭐 그렇게 나쁜 출발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한편 든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로 19금 영화의 계보를 시작한 나에게 “19금 영화로 인한 트라우마”는 의외로 성인이 되고 나서 찾아온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내가 다시는 베드신이나 섹스신이 나오는 영화를 볼 수 없게 만든 영화. 바로 <무법자>다. 이렇게 제목까지 다 얘기했으니 그 영화와 관계된 분들이 나를 정말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모든 여성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웬만하면 보시지 마라!’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를 보고서 한동안 모든 남자들이 싫어졌으며, 또 무서웠다. 심지어 그 영화를 본 이후에는 어떤 영화건(하물며 로맨틱코미디라도!)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면서 로맨틱한 장면이 시작되면 머릿속에 남아 있던 그 영화의 잔상이 떠올라 부랴부랴 정지버튼을 누르곤 했다. 영화 한 편이 나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겼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지.


   영화 <무법자>는 1990년대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희대의 연쇄살인조직 ‘지존파’ 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이다. 범죄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망설임 없이 영화를 관람했다. 그런데 영화는 굳이 이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강간과 폭행에 대한 묘사가 심하다. 심지어 아주 길다! 왜 왜 왜 그렇게 길게 그렇게 폭력적으로 묘사해야만 했을까? 그들의 비인간적인 범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성폭행’ ‘강간’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여성들은 너무 끔찍하고 더러운 기분을 느낀다. 그런데 그토록 폭력에 무참히 희생되는 여성을 전시하듯 긴 시간에 걸쳐 보여줘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을 말하고자 저렇게 묘사하는가…….


   아무튼 나는 그 이후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고 정말 나말고 또 다른 여성이 그 장면을 보지 않기를 진심으로 오랫동안 기도했다. 나 같은 트라우마를 갖게 되는 사람이 더 생기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다. 영화 한 편으로 인해 로맨틱코미디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불쌍한 관객. 아니지. 나는 30대 중반에 이 영화를 봤으니 불행 중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이 영화를 10대나 20대에 보게 되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너무나 비극적이다.


   나는 한국 영화를 사랑한다. 한국 영화를 보며 울고 웃으며 자라왔다. 그런데 재미가 있고 없음을 떠나서 그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아무리 좋은 의미를 담았다고 해도 일련의 연출로 인해 한 장면만 오롯이 관객이 가슴 속에 남는 영화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부탁드린다. 폭력이 필요한 장면에서 강한 인상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폭력의 전시가 아니라 다른 방법을 조금 더 연구를 해주시길.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부탁드리는 바이다.




   <계속>




    김미연 PD

    JTBC <방구석1열>

    JTBC <전체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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