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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Aug 23. 2021

<6화> 일본 문화 개방 이전, 영화를 찾아다니던 시절

이화정 영화기자





   ‘애걔. 겨우 이런 화면이었어?’ 


   너무 많은 말을 들은 터라 이미 본 듯했던 아름다운 영상이 펼쳐질 거라 기대했는데, 눈이 부시다던 삿포로의 눈밭은 영화 내내 거무튀튀하더니 이내 은갈치 빛을 내며 지지직거렸다. 그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하얀 눈의 고장, 삿포로가 시시해 지는 순간이었다. 아마 처음 복사본을 본 사람은 새하얀 설원을 그대로 보았겠지. 하지만 우리가 씨네필들의 필감작으로 입소문이 난 <러브레터>를 모여 본 그곳은 불법 복제한 비디오테이프를 상영하는 영화 소모임이었고, 나는 이미 손에 손을 거쳐 상영되어 명을 다해 가는 비디오테이프와 만난 대략 백 번째쯤 관객이었다. 


   그렇게 전체 영화의 1/3쯤은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조악한 화면으로 참고 보면서도, 나는 연신 흐르는 눈물을 소맷부리로 닦아내야 했다. 눈물의 정체는 이랬다.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이와이 슌지의 감수성이 8할, 마침 그 시기에 청춘기를 지나고 있었던 내 감수성이 1.5할 정도. 그리고 나머지는, 아니 훗날 멜로영화의 클래식이 될 영화를 이런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맞닥뜨릴 일인가 하는 당혹감. 그게 작지만 강하게 서러움의 크기를 잠식했던 것 같다. 


   나카야마 미호가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오겡키데스카!” “와타시와 겡키~!” 외치던 그 하얀 설원을 커다란 스크린에서 제대로 본 건 그로부터 4, 5년이 지난 1999년 11월의 일이었다. 1995년 작인 <러브레터>는 영화 꽤나 본다는 이들이 모두 알음알음 수소문해 본 뒤에야 극장에서 상영됐다. ‘재개봉’이 아니라 ‘정식 개봉’이었다. 몇 해 전 한중일3국협력사무국에서 3국의 콘텐츠 교류의 일환으로 <러브레터>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등 이와이 슌지 작품의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카와이 신야 씨가 한국에 방문했었다. 그때 토크 행사를 진행하며 만나 나의 <러브레터> 불법 관람 경험을 무용담처럼 늘어놨던 기억이 난다. 1995년 일본 자국에서 개봉한 영화가 4년이 지나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 뒤 엄청난 흥행을 거두며 한국 팬에게 그토록 소구할 줄은 카와이 신야 씨도 감독인 이와이 슌지도 몰랐다고 한다. 


   지금부터 바로 그 세기 전 이야기를 잠깐 전하려 한다. 관객과의 대화를 끝내고 뒤풀이에서 감독, 배우,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모인 자리에서였다. 대략 또래인 우리는 그때 뭐에 꽂혔는지 이제는 단종된 최애 과자의 랭킹을 정하며 열을 내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사루비아, 초코송이, 짝꿍 같은 것들이었다. 한번 불러 온 추억 소환 놀이는 멈추지 않고 급기야 장국영, 종초홍, 주윤발, 매염방, 유덕화, 원표에 이르는 최애 홍콩 배우 나열하기를 경유해 일본문화 개방 이후 첫 번째 공식 수입작 이름 맞추기에 다다랐다. 


   1998년 10월 이전, 일본 문화 소비는 금지였다. 영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상이 잘 안 가겠지만,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었고, 비행기 뒷자석에 무려 흡연석!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처럼 비행기가 홍콩 시내에 있던 카이탁공항에 착륙하던 케케묵은 시절의 이야기다. 그땐 공개된 석상에서 가수가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도, 일본 영화를 보는 것도, 일본 책을 읽는 것도 다 불법이자 논란이었다. 영화 <레토>에서 구소련의 청춘들이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 믹 재거의 음악을 몰래 흡수하는 것처럼, X세대로 통칭되던 우리는 그때 이미 몰래 금지된 일본 영화와 만화의 세계에 접근했다. 


   한일문화 교류가 급물살을 탄 건 故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간에 이르러서였다. 10월 1차 개방에 앞서 4월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는 대통령 발표문이 있었다. 그전까지 국가는 일본 문화를 개방했다가 우리 문화가 잠식 당할까봐, 무분별한 개방으로 자칫 저질 콘텐츠가 유통될까봐 ‘두려워’했다. ‘왜색’은 농도의 정도를 나타내는 ‘짙다’라는 말과 호응을 이루었고, 결국 개방은 2005년에 이르러 완전히 개방하기까지 자칫 나쁜 콘텐츠에 ‘물들지 않도록’ 1차, 2차, 3차, 4차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영화는 대중 상업영화에 앞서 칸, 베니스, 베를린 등 국제영화제 수상으로 작품성 인증 마크를 얻은 작품만이 수입될 수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준 아래 수입된 작품은 폭력 수위 최고치인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_비>나 <소나티네>, 선정성으로도 할 말이 많은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같은 작품이었으니, 당국도 허가 의도를 빗겨난 결과에 꽤나 난감했을 거다. 


   정부의 우려처럼 일본 문화에 순식간에 잠식되는 일은 없었다. (사실 그보다 문제였던 건 방송사였다. 판권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던 때라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포맷을 버젓이 자기 프로그램으로 둔갑시키기 일쑤였다.) 어쨌든 공식 수입 1호 작은 기타노 다케시가 연출한 <하나-비>(1997)였다. 각각의 수입 연도까지 달달 외우고 다니던 우리는 이제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냐는 듯, 그날 누구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영화기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첫 직장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수입사 대원동화(지금은 대원 C&A)에서 근무했었다. 일본 문화 콘텐츠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은 시절에 나는 업무를 핑계로 각종 일본 콘텐츠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한 작품 한 작품이 배고픈 영화,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직장이었다. 당시 “애니메이션도 곧 개방된다”는 말이 ‘카더라’처럼 회사 내에 떠돌았다. 창고에 쌓인 화제의 작품이 대중에게 소개되는 날, 실무자로서 활약할 그날을 모두가 꿈꾸고 바라던 시기였다.  


   당시 내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일본 문화 개방에 맞춰 이 작품들을 어떻게 상영할지”에 대한 기획서를 쓰는 것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1991년 새롭게 개봉해 이미 애니메이션이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었다. 성인용으로도 제작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한참 전부터 대두되었다. 한국도 성인 관객을 타깃으로 한 창작 애니메이션에 한창 투자하던 시기였다. 출근하면 자리에 앉아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브리 사의 애니메이션은 디즈니 사의 작품처럼 성인도 즐길 수 있는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그럴싸하게 기획서의 초안을 써 내려갔다.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같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언급할 때는 좋아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문제는 ‘곧’ 내려진다던 상영 허가가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 나는 매일 계획만 한참 하다 퇴근하고, 다음 날 다시 계획하고 퇴근하고를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거의 모든 업무가 지지부진하게 ‘플랜’에만 머무르고 있던 때라 초조함도 늘어갔다. 23번 버스를 몰며 시를 쓰고 삶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유지하는 <패터슨>의 패터슨 씨처럼 매일의 반복이 일상의 루틴이자 시가 되는 삶이었으면 좋았건만, 나는 그 도래하지 않을 시간을 향해 계획표를 짜는 것이 그렇게 갑갑할 수가 없었고,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갑자기 어느 날 사표를 던지고 퇴사했다. 


   아, 퇴사 전 그곳에서 보았던 블록버스터급 이미지 중 하나는 산처럼 쌓인 해적판 무더기였다. 정식 수입이 허가되지 않은 틈을 타 해적판이 시중에 대량 유통되고 있었는데, 경찰과 출판 담당자들이 조를 이루어 불시에 판매처를 습격해 수거한 책들을 회사 앞마당에 쌓아두는 해적판 대량 수거의 날이 있었다. 그렇게 수거한 책들은 전량 소각될 예정이었다. 직원들 대다수가 덕업이 일치된 삶을 살았으니 좀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가도, 이내 불법 해적물에게 안녕을 고하고 돌아섰던 기억 한 토막. 


   내 기획서 초안이 실현된 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였다. (내 기획서대로 진행되지는 않았겠지만) 영화기자가 되고 난 후 시사회를 통해 기획서에 썼다 지웠다 반복했던 그 작품을 대형 스크린으로 영접할 수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신작 <바람이 분다>(2013)를 공개했을 때는 기자 신분으로 정식으로 도쿄에 있는 지브리 스튜디오를 가서 하야오 감독 인터뷰도 했으니, 일본 문화를 불허하던 문화 개방 이전의 일은 일찍이 세기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아예 OTT 서비스 넷플릭스에서 지브리 사의 애니메이션 판권을 서비스하고 있어, 클릭 몇 번으로 최상 퀄리티의 작품을 원하는 장소에서 볼 수 있다. 판권 허가에 까다로운 지브리 사에 넷플릭스가 어마어마한 판권료를 지불했다는 후문이 들려온다. 얼마 전 내가 진행하는 영화 소모임에 갔더니 “넷플릭스를 통해서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처음 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 저마다 작품을 만나는 통로가 이토록 자유롭고 다양해졌다. 


   문득 사회 초년병 시절 사무실에 앉아 언제가 될지도 모를 이들 작품의 상영 날을 그리며 그럴 듯한 말로 채워진 기획서를 쓰고 고치고 반복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많은 것들이 막혀 있던 시절, 작은 틈새로 영화를 보던 그때의 이야기다.




   <계속>



  

    이화정

    前 「씨네21」 기자 

    前 「필름2.0」 기자 

    前 「무비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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