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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Aug 19. 2021

<5화> 직장을 다녀야 하는 이유

주성철 영화기자





   <직장을 다녀야 하는 이유와 때려 쳐야 하는 이유>라는 챕터를 쓰겠다고 호언장담하고 가장 크게 후회했다. 직장을 때려 친 현재의 만족도가 크다는 점에서 무턱대고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생각해보면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직장’이라는 형태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는 ‘영화사’와 ‘홍보사’ 혹은 ‘언론사’ 정도로 한정될 텐데, 그나마도 아마 전체 3분의 1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이른바 ‘기획안’과 씨름하며 여러 지원 제도의 문을 두드리는 프리랜서들이다. 그중에서도 갈수록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영화평론가의 삶은 특히 더 고단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주제에 대해 뭘 써야 할지 몰라 후회한 것과 별개로 중요한 것은 이 업계에서 일하는 모두는 운명적으로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언젠가, 어쩌면 다른 업계보다 훨씬 일찍 맞이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김정연 작가의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 제목처럼 일찍 마음먹을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크리에이터로서의 운명이자 이 업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직장을 다녀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급여생활자의 삶이 먼 미래를 내다보는 지구력의 바탕이 되어줘서다. 부산 출신 ‘취준생’이 ‘영화인’이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의 연출부로 지원하는 등 영화 스태프가 되는 방식을 택하기는 어려웠다. 표준근로계약서도 없던 시절, 연봉 100만 원 수준으로 고된 연출부 생활을 버텼다는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는 최소한 귀가해서 잠을 청할 집이라도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일단 서울에서 월셋방 이상의 거처를 마련하고 매월 최소 생활비를 스스로 버는 수준이 아니면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친구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질 수도 있겠으나 그 또한 한계가 있었다. 무턱대고 일단 서울로 가서 아무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해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주객이 전도될 건 뻔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지원할 수 있는 분야가 ‘영화사 기획실 직원’과 ‘영화잡지사 기자’ 두 방향으로만 좁혀졌다. 나중에 만나게 된 수많은 영화인들, 특히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거의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는 문제는 꿈이고 나발이고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개의 길은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선택지처럼 전혀 다른 길이기도 했다. 영화 만드는 일을 할 것이냐 아니면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쓰는 일을 할 것이냐 하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였다. 후자로 마음이 기울긴 했으나, 대학교 4학년생 입장에서는 사실상 ‘상시 모집’인 전자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메일 접수가 없던 시절, 우체국에서 막대한 등기 우편 비용을 써가며 닥치는 대로 원서를 보냈다. 거의 30개 가까운 영화사에 지원하면서 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무궁화호를 거의 매주 탔던 것 같다. 서울과 부산을 세 시간 이내로 주파하는 KTX가 생기기 전이었기에,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려면 심야 기차를 타고 기차에서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면 비디오방에서 잠시 눈을 부친 뒤 면접을 보러 가고, 반대로 새벽에 부산에 도착하면 피곤한 상태로 바로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편도 여섯 시간 정도 소요되는 무궁화호에서 잠을 청하며 면접을 보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원이 생겨 취업 공고를 냈던 영화잡지사 <키노>에 필기시험과 면접시험 모두 합격하고 난 뒤 무언가 최종 결정된 편안한 마음으로, 처음 무궁화호보다 한 등급 위인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로 향하던 때의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드디어! 영화기자로 일하게 되면서 느낀 ‘직장을 다녀야 하는 이유’는, 자연스러운 인맥 형성이다. 단순히 영화인들과의 교류를 의미하는 것도 있지만 자신이 영화평론가라 불리건 영화 저널리스트라 불리건 간에 향후 이 인맥으로 말미암아 ‘영화 글을 쓰는 프리랜서’로서 언론 시사회에 초청받아 개봉 영화를 미리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현재는 영화마케팅사협회에서 인정한 이들만 시사회에 갈 수 있고, 이런저런 자료들도 받을 수 있기에 프리랜서 활동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물론 개봉 당일 ‘내돈내산’으로 영화를 보고 재빨리 리뷰를 쓰거나 유튜브 영상을 제작할 수도 있겠으나 이른바 ‘속도전’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즉 영화평론가나 영화 저널리스트, 더 넓게는 영화 블로거로 살기 위해서도 얼마간 ‘기자 생활’은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영화기자를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매체의 이름값이나 규모를 생각하지 말고 일단 인턴 기자라도 취업부터 하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영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리뷰든 섭외든 영화홍보사나 제작사를 통해 특정 영화에 ‘접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접점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면 의외로 이름이 알려진 매체에서 일하는 것이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이름이 알려진 매체의 기자건, 잘 알 수 없는 인터넷 매체의 기자건 시사회에서 똑같이 한 자리를 받고, 똑같은 분량과 내용의 보도자료를 받는다. 감독이나 배우와 인터뷰를 진행할 때도 ‘라운드 테이블’이라는 형태로 별반 차이 없는 인터뷰 기회를 얻기도 한다. 아무리 비싼 고급차라 하더라도 경차와 마찬가지로 한 차선으로만 달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차래도 두 칸씩 달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라고 비교하면 말이 되려나. 


   자, 이제 직장을 때려 쳐야 하는 이유! 보통의 직장인들이 그만둘 때와 닮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후자의 다른 점에 집중해보자면, 기본적으로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영화기자라면 보통 상업영화들이 개봉하는 일정에 맞춰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주간지 영화기자라면 매주 일정량의 리뷰와 인터뷰를 소화해야 하는데, 1년에 총 50권의 잡지, 즉 50번의 마감을 해야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영화인들을 즐겁게 5번 만나기 위해 나머지 45번의 직업적 마감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 1년의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직장인이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며 살 수 있냐” 하는 것 또한 불변의 진리지만, 이 직종은 그 괴리감이 유독 심한 것 같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던 영화에 대해 리뷰를 쓰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었다. 그나마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별점계의 성철 스님’이라 불릴 정도로 후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었기에 그 스트레스는 덜한 편이었고, 때론 그 괴리감에서 얻게 되는 새로운 매력도 분명 있었다. 


   이제 전자의 닮은 점을 이야기해보자면, 여느 직장에서나 겪을 법한 스트레스가 똑같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럼 똑같지 뭐가 다르겠는가?’ 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 영화기자가 된 사람들은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하기에 그것이 깨졌을 때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뭐야, 딴 직장하고 다를 게 없네?’로 시작해서 ‘뭐야, 딴 직장들보다 더 심하잖아!’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나 할까. 기본적으로 업무 환경이 불규칙해서 주 52시간 체계적인 업무 시스템을 적용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25시간도 일하지 않으면서 힘들다고 불평이 가득한 동료들의 업무를 떠맡아 속으로 스트레스를 삭이는 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급기야 영화기자라는 직업은 이른바 ‘언론고시’를 치르는 일간지 본위의 ‘언론인’으로 분류되지도 않기에, 솔직히 말해 검증된 저널리스트라고 보기도 애매하다. 갈수록 함량 미달의 기사들이 넘쳐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결정적으로 <키노>와 <씨네21>이 창간하며 이후 수많은 영화 매체들이 한국영화의 새로운 르네상스와 함께했지만, 오히려 상황은 점점 더 열악해져 갔다. 아무리 한국영화가 잘 나가도 출판시장 혹은 매체 환경의 침체라는 전반적인 업계 상황과 동떨어질 수는 없던 것이다. K팝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과 별개로 KBS <뮤직뱅크> MBC <쇼! 음악중심> SBS <인기가요> 같은 프로그램들이 시청률 1%의 벽과 싸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런 괴리감이 20년째 같은 일을 해오면서 느낀 절망감의 근원이라 볼 수도 있겠다.


   조심스런 얘기지만, 개인적으로는 코로나19가 회사를 그만둔 후에 터져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회사를 그만두던 즈음 이런저런 내적 외적 갈등이 있었지만, 그 과정 중에 코로나19가 터졌다면 책임감 때문에라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저앉았을 것만 같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19가 1년 이상 갈 것이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칸국제영화제건 부산국제영화제건 한두 달 연기해 개최하자는 논의만 있던 때였다. 그처럼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 안정세를 찾을 때까지 어떻게든 직장을 지키려 했을 것 같다, 고 쓰고 보니 정말 그때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영화 개봉이나 영화제 개최 등이 사실상 흐지부지한 상태로 이전과 다르게 이어지고, 매체로서도 딱히 뭔가 할 수 없는 시간들이 계속됐다. 거의 2년 동안 이런 무력한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회사에 남은 이들이 걱정되고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때려 친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때려 쳐야 하는 이유’에는 그것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때려 치는 순간 이후의 일만 생각하면 된다. 오히려 그것이 유튜브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성철 스님과 달리 이제는 그 스님의 이름을 거론하기 좀 애매해졌지만, 그가 얘기한 것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계속>





   주성철

   前 「씨네21」 편집장 

   前 「필름 2.0」 기자 

   前 「키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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