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영화칼럼니스트
나는 고백한다. 아니다. 나는 반성한다. 아니다. 내가 정말로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일단은 그냥 고백이라고 하자.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내린 분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다. 별점과 백자평, 리뷰 이야기다. 한국에서 영화 기자 혹은 영화 비평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별점, 백자평, 리뷰와 멀리 떨어질 수 없다. 특히 당신이 그놈의 별점과 백자평을 한국에 창조한 영화 잡지사 출신이라면 더더욱 떨어질 수 없다.
내가 그 잡지사에 들어간 건 2004년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리뷰를 써야 했다. 사실 나는 비평가로 잡지에 입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영화 기자들은 맡은 역할이 타국에 비해 좀 많다. 사실 영미권으로 따지자면 ‘기자’와 ‘비평가’는 확실하게 역할이 나누어져 있다. 기자는 말 그대로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는 사람이다. 배우나 감독, 스태프와의 인터뷰도 기사다. 비평가는 비평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취재를 할 필요가 없고 인터뷰를 할 이유도 없다. 영화를 보고 비평을 쓰는 것이 유일한 사명이다. ‘영화 기자’로서 유명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평가’로서 유명해지는 사람은 많다. 내가 좋아하는 폴린 카엘이나 로저 에버트는 오로지 영화 평론가로서 전설이 된 사람들이다.
두 직업은 철저하게 갈라지는 게 맞다. 구분되는 게 맞다. 그걸 나는 영화 잡지사에 다니면서 슬슬 깨달았다. 장르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그 잡지에서 장르영화 담당이었다. 자연스럽게 취재처도 장르영화를 많이 만드는 제작사로 채워졌다. 당시 내가 가장 기대를 걸고 있던 한국 호러영화 감독은 안병기였다. 2002년 작인 <가위>와 2002년 작인 <폰>은 한국형 오컬트-슬래셔 영화의 어떤 출발점과도 같은 영화들이었다. 2004년 작인 <분신사바>는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뭔가 건져내 다시 한번 씻어서 활용해볼 만한 요소들은 있었다. 안병기 감독은 2006년에 강풀 원작 영화 <아파트>를 만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현장 취재를 갔더니 감독이 나를 유독 반겼다. 신뢰다. ‘너는 내가 하려는 게 뭔지 알고 있는 기자니까 믿는다’는 신호와도 같은 것이다. 영화 잡지 기자가 감독과 친밀한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다른 기자들보다 먼저 정보를 알 수 있고, 더 좋은 기사를 쓸 수도 있다. 그런 기회를 잡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영화가 개봉하면서 벌어졌다. 시사회를 갔다. 안병기 감독은 당시 한국에서 ‘호러영화의 신’ 정도의 위치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파트>는 고소영의 오랜만의 영화 복귀작이었다. 당연히 언론의 관심도 꽤나 높았다. 많은 기자들이 시사회에 참석했다. 시사회가 끝나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이미 2003년도에 김지운 감독이 <장화, 홍련>이라는 역작을 내놓은 뒤였다. 호러영화계의 판도도 슬슬 바뀌고 있는 무렵이었다. 안병기 감독은 여전히 자신이 잘 하고 싶어 하는 걸 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회사로 돌아간 나는 머리를 싸맸다. 문제는 명백했다. 나는 그 주 <아파트>의 리뷰를 쓰게 되어 있었다. 별점은 피해갈 수도 있다. 시사회에 많은 평론가들이 참석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별점을 받아 채우면 된다.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내가 담당하는 영화사의 영화가 후질 때는 별점 평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어쩔 도리 없다. 내가 담당하는 영화사나 감독의 영화에 박한 별점을 줬다가는 사이가 영 어색해질 것이다. 내가 별점을 주지 않은 영화라면 이렇게 변명을 하면 된다. “그러게요. 평론가들이 참 별점을 박하게 줬네요. 저는 괜찮았는데…….” 괜찮았을 리가 만무하지. 하지만 내가 직접 별점을 준 것은 아니니 그들도 뭐라고 딱히 할 말은 없다. 종종 나는 “감독님 그건 박평식이잖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굴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짜고 박한 별점과 백자평만으로 유명해진 그분의 이름을 대면 다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파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기자들 중 영화를 본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시사회는 다시 열리지 않을 예정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내가 리뷰를 써야만 했다. 그래서 뭐라고 썼냐고? 그 리뷰의 마지막 단락은 다음과 같다. “오히려 가장 섬뜩한 장면은 서서히 베란다로 걸어 나와 느닷없이 뛰어내리는 남자를 세진이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순간이다. 별다른 사운드도 입혀지지 않은 채 금세 지나가는 이 장면은 구로사와 기요시를 아주 잠시나마 연상시킨다. 머리를 풀어헤친 원혼의 눈빛으로 호소하는 대신 그런 현대적 삶의 무표정한 섬뜩함에 집중했더라면 <아파트>는 안병기 감독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걸 지금 와서 솔직한 마음으로 다시 쓰자면 다음과 같다. “그나마 유일하게 약간이라도 섬뜩하기라도 한 장면은 서서히 베란다로 걸어 나와 느닷없이 뛰어내리는 남자를 세진이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순간이다. 그래봐야 구로사와 기요시는 어림도 없다만, 머리 풀어헤친 귀신의 곡성만으로는 이제 한국에서 호러영화로 돈 벌기는 힘들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나의 ‘덜’ 솔직한 리뷰도 안병기 감독에게는 아마도 어쩌면 당연히 상처가 됐을 것이다. 매번 영화사에 찾아가서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기획 기사도 쓰던 기자가 그토록 박하게 리뷰를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이후로 안병기 감독과 나의 사이는 약간 어색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이건 내가 MBTI 중 INFP 타입이라 혼자서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MBTI를 믿냐고? 아니다. 나는 사람을 그렇게 비과학적으로 나눌 수 있다고 믿지 않으므로 MBTI도 일종의 미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학하고 싶을 때 MBTI만큼 좋은 핑계는 없기 때문에 굳이 그걸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 어제 일 하나도 못 하고 잤어……. INFP니까. 도저히 이번에는 마감을 못 지킬 거 같애……. INFP니까. ‘푸른숲’ 편집자님들 저는 도저히 이 책을 다 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요……. INFP니까. 정말이지 MBTI는 위대하다.
여하튼 그 순간을 계기로 나는 전 세계에서 한국 영화 기자들만이 갖고 있는 딜레마를 발견하게 됐다. 오로지 한국 영화 기자들만이 비평을 함께 한다. 원래 비평은 기자들의 몫이 아니다. 비평가의 몫이다. 비평을 하는 사람이니까 비평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미권 잡지들은 특히 두 역할을 엄격하게 나눈다. 영화 비평에 인맥으로 인한 온정이 얽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어쩌다 보니 영화 기자가 비평가의 역할까지 함께 맡게 진화해왔다. 그래서 당신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보는 리뷰 중 누가 봐도 재미없고 후진 영화의 리뷰는 거칠게 두 종류로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관계자와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악평으로 보이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리뷰와, 관계자와 잘 알지만 이건 진짜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관계 포기 선언에 가까운 리뷰. 나? 나는 주로 후자를 잘 쓰는 기자였다. MBTI 분류법에 따르면 가장 거짓말을 못하는 게 INFP다. 그래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감독님들……. INFP니까.
게다가 별점과 백자평을 쓰기 시작하자 인터넷 곳곳에서 욕이 쏟아졌다. 나는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에 ‘에고의 빅뱅’이라는 백자평을 쓰고 별 세 개를 줬다. 뤽 베송의 <루시>에는 별 네 개를 준 것으로 기억한다. 당신이 아트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뭐 이런 신성모독자가 다 있냐며 짜증을 내고 있을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각각의 영화에 별점을 줄 때 항상 같은 기준을 과학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트리 오브 라이프>는 테렌스 멜릭의 영화 중에서 예술적 거드름이 가장 심한 영화였다. <루시>는 뤽 베송 특유의 ‘갈 수 있는 데까지 막 가보자 그냥!’ 정신이 가장 투철한 영화였다. 전자는 근사한데 매력이 없었다. 후자는 엉망인데 매력이 쩔었다. 그 순간의 기분이 별의 숫자를 만든다. 영화 기자들에게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는 후져도 3점부터 시작해야 마땅하고, 마이클 베이 영화는 좋아도 3점이 최고여야 마땅하다’는 기준 같은 건 없다. 별점도 리뷰도 사람이 주는 것이다. 당연히 영화적 지식이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그 기준은 ‘취향’이다.
한국에서 영화 기자나 평론가로 살아가려면 이 딜레마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소셜미디어가 생기자 딜레마는 더욱 강력해졌다. 당신이 영화 기자로 일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많은 사람들을 향해 떠들고 싶어 입과 손이 근질근질한 타입이라는 의미다. 시사회에서 “와 기자님 오랜만이에요!”라고 당신에게 환하게 인사한 사람들이 만들고 마케팅을 한 수십억짜리 영화를 2시간 뒤에 페이스북에서 난도질하는 아주 뒤틀리고 비틀린 심성의 소유자라는 의미다. 맞다. 반성한다. 고백한다. 나는 그런 심성의 소유자다. INFP라 그런지 악평을 하고 나면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만들었을까 봐 밤새 전전긍긍하긴 하지만, 역시 INFP라 그런지 솔직하지 않으면 더욱 마음이 힘들어진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잡지 다니던 시절 한 선배의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다. 그 선배는 주로 아트영화를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2009년 여름 최고의 화제작은 역시 윤제균의 <해운대>였다. 시사회 다음날 나는 <해운대>에 별점 4점을 주고 ‘장인들이 성심성의껏 만든 순도 99.9% 오락영화’라는 백자평을 덧붙였다. 그걸 본 선배는 내 자리에 와서 정말이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별점 네 개를 준 걸 데스크에서 봤는데. 나는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하다. 니가 다음 주에 잡지에 <해운대>에 대한 비평을 써주면 좋겠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는 정말이지 거의 인류학적인 불가해함을 가득 품은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음 주 잡지에 <해운대>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나에게는 별로 쓸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해운대>에 4개의 별점을 준 이유? 모르겠다. 지금은 잊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의 별점은 정말이지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 늙는다. 변화한다. 바뀐다. 진심도 바뀐다. 어제의 진심은 오늘의 진심과 다르다. 내일의 진심은 오늘의 진심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제의 진심은 영원히 남는다. 그렇게 남아서 너 따위의 진심이 이 따위였노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시도 때로 없이 온라인에서 툭툭 튀어나와 뺨을 때릴 것이다. 뭐 어쩌겠는가.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다. 지금 아트 영화의 신이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트리 오브 라이프>와 <루시> 중 생의 마지막으로 볼 영화를 정하라”라고 한다면?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루시>를 선택할 것이다. 생의 마지막 영화로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보는 것만큼 뻔하고 뻔뻔한 클리셰가 또 어딨겠냐고 비웃으면서 말이다.
<계속>
김도훈 영화칼럼니스트
前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前 「GEEK」 피처디렉터
前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