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비건조 Nov 05. 2021

<20화> 나의 왕가위 연대기

주성철 영화평론가




   “우정은 약속이다!” 


   때는 바야흐로 홍콩영화에 완전히 빠져 살던 중딩 시절의 1990년, 가슴을 후벼파는 <아비정전> 영화 포스터 헤드카피에 심장이 마구 나댔다. 당시로서는 장국영, 유덕화, 양조위, 장학우, 장만옥, 유가령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였기에 친구들은 함께 그들 중에서 ‘약속을 안 지킨 놈이 누구냐!’며 서둘러 우리만의 스토리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앞서 데뷔작 <열혈남아>(1988)에서 감각적인 스텝프린트 기법을 보여준 왕가위였기에 드디어 홍콩 누아르의 결정판이 나왔다는 기대감에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정작 극장에서는 긴 침묵이 흘렀다. 영화에서는 총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고 장국영은 거울을 보다 말고 갑자기 맘보춤을 추었으며 유덕화와 장만옥은 그냥 걷기만 했다. 그렇게 영화는 조용히 끝났다. 나중에 서울의 개봉관에서는 극장 스크린을 찢고 단체로 환불 소동을 벌이는 대참사가 벌어졌다는 무용담을 들었는데, 우리는 그냥 조용히 극장을 나왔다.


   나 또한 실망감에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계속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국영이 힘들게 필리핀까지 가서 친엄마 얼굴도 보지 못해놓고는, 무슨 오기인지 모르겠으나 자기도 똑같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노라며 두 주먹 꽉 쥐고 씩씩하게 돌아 나오던 그 뒷모습의 핸드헬드 촬영이었다. 그러고 보니 <열혈남아>에서도 가장 좋았던 장면은 장학우가 에어컨을 사서 힘들게 들쳐메고는 홍콩의 변두리 티우겡렝에 사는 엄마를 찾아갔으나, 이미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엄마가 곤란하다며 만나주지 않는 장면이었다. “엄마, 더운 거 싫어하잖아. 내가 에어컨 사왔어. 잠깐 얼굴 보면 안 돼?”라며 동네에 다 도착해서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지만 엄마는 집 위치도 가르쳐주지 않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다. 사실 장학우는 자신의 빚을 한 방에 청산하기 위해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청부살인을 수락하고, 마지막으로 엄마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게 엄마를 만나지 못한 장학우는 에어컨을 냅다 바다에 던져 버린다. 그러니까 <아비정전>과 <열혈남아> 모두 엄마를 보지 못하고 죽는 아들의 이야기이자,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여성이 혈연(血緣)을 끊는 이야기다. 나름 화목한 가정에서 살아가던 내가 왜 그런 장면들에 꽂혔는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때부터 왕가위라는 감독에게 끌렸던 것만은 분명하다. 거창하게 말해, 중국 본토와의 오랜 혈연관계를 거부하는 홍콩이라는 무국적 다문화 도시국가의 정체성도 거기 있다고 생각됐다.


   오우삼의 의리(義理)의 세계로부터, 왕가위의 실연(失戀)의 세계로 넘어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중경삼림>(1994)이었다. 만우절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내 사랑의 유통기한을 만 년으로 하고 싶다”는 경찰 223(금성무), 매일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며 술에 의지하는 금발머리 마약밀매상(임청하), 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외면하며 매일 똑같은 곳을 순찰하는 경찰 663(양조위), 경찰 663의 단골 식당에서 일하며 그의 맨션 열쇠를 손에 쥔 페이(왕정문), 그렇게 <중경삼림>은 네 명의 인물이 서로 오고가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모두 홍콩섬의 중심지 센트럴의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1995년 추석 즈음 첫 실연의 아픔을 겪은 뒤 <중경삼림>을 극장에서 넋을 잃고 내리 세 번을 연달아 본 적 있다. 지금처럼 지정좌석제도 아니던 시절, 다음 회 차 영화가 매진만 아니면 딱히 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24시간 연속 상영관이었다면 아마도 밤새 이 영화를 봤을 것이다. 그렇게 실연의 고통을 잊기 위해 금성무가 운동장을 열심히 뛰면서 “땀을 많이 흘려서 수분이 다 빠지면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없겠지”라는 대사에 엉엉 울고 말았다. 괜히 금성무를 따라 몇 날 며칠 동네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전력 질주하기도 했을뿐더러, 급기야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영화 속 그 장소를 알아내어 홍콩 여행 때 들르기도 했다. 무슨 그런 장소까지 찾아가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금성무가 철조망에 삐삐를 꽂아놓고 눈물을 머금고 조깅을 하던 그곳에 반드시 가야만 했다. 물론 꽂아둘 삐삐는 없었지만 내 두 다리는 여전했다. 하지만 불과 10미터도 채 뛰지 못하고 관리원 아저씨의 제지로 쫓겨나야 했다. 홍콩에서 꽤 유명한 소프트볼 경기장이기도 해서 아무나 그렇게 들어와 운동 삼아 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중경삼림>의 금성무는 아무도 없는 심야에 뛰긴 했었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 홍콩 느와르와 작별하고 난 뒤, 오우삼과 주윤발은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홍콩에는 장국영과 왕가위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장국영은 왕가위와 <아비정전>을 시작으로 <동사서독>(1994)과 <해피 투게더>(1997)까지 세 작품을 함께했다. 세 편의 공통점이라면 왕가위가 언제나 장국영을 홍콩이 아닌 곳에 버려두고 떠났다는 것이다. <아비정전>에서는 필리핀에, <동사서독>에서는 저 멀리 사막에, <해피 투게더>에서는 그보다 먼 아르헨티나에 버렸다. <해피 투게더>는 물론 <화양연화>(2000)와 <일대종사>(2012)에서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는 양조위와 정반대다. 왕가위 영화 속 장국영과 양조위의 결정적인 차이는 스타일상으로 ‘외향적인 장국영’과 ‘내향적인 양조위’라는 대조법에 있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로드무비라고 할 수 있는 왕가위 영화에서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 있다. 떠나는 자와 돌아오는 자.


   그런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한 최고의 작품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인 <해피 투게더>는 “그는 돌아와서 내게 말할 것이다. 다시 시작하자”라는 말로 기억된다.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났지만, 매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데 <해피 투게더>는 1997년 7월 14일, 한국 공연윤리위원회의 재심 결과 “이 영화는 동성애가 주제로 우리 정서에 반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유로 개봉이 금지됐다. 심지어 왕가위는 홍보활동을 위해 방한했다가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그에 앞서 7월 1일 드디어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됐다.) 그로부터 무삭제판이 공개되는 데는 거의 10년의 세월이 걸렸고, 그 긴 세월이 흐르는 사이 장국영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렇게 뒤늦게 극장에서 제대로 감상한 <해피 투게더>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프랑스 영화잡지 <포지티프>의 평론가 노엘 에르페가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해피 투게더>는 순간과 본능이 겹쳐짐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내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상을 전달할 것을 고집한다.” 이구아수폭포 장면에 이르면 그 인상들로 인해 절대적이고도 불규칙한 흥분 상태가 끝없이 이어진다. 그것은 앞으로 그 누구도 감히 만들어내지 못할 영화의 진경(眞境)이었다. 


   이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 왕가위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매혹에 대한 뻔한 극찬이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그 누구도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최고의 배우이자 1년 내내 콘서트 스케줄이 빽빽할 정도로 최정상급 가수이기도 했던 장국영이, 거의 최소한의 얼개만 정해두고 영화 작업을 해나가는 왕가위와 그런 대단한 작품들을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기적이다. <아비정전>을 시작으로 <동사서독>을 중국 본토의 사막에서, <해피 투게더>를 홍콩의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무작정 그 오랜 시간 머무르며 작품을 만드는 것이 과연 지금 가능한 일일까. <해피 투게더>의 제작 뒷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1999)에서 왕가위는 이렇게 얘기한다. “아무런 것도 정해두지 않고 지금 아르헨티나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지만, 나는 이 배우들과 함께라면 엄청난 작품이 나올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난 이제 여행을 떠난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그런 예정되지 않은 ‘여행’으로 표현하던 낭만의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 지극히 개인적인 독립영화 작업이 아니고서야, 이제는 자본과 일정이 빽빽하게 맞물리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영화현장에서 그런 방식의 제작은 더 이상 이뤄지지 못한다. ‘왕가위의 시대’ 혹은 ‘왕가위 월드’라는 표현의 핵심이 거기 있다.   


   그러다 왕가위를 처음 만나 인터뷰한 것은, 그가 <동사서독>을 재편집하여 완성한 <동사서독 리덕스>(2008)를 공개했을 때였다. 1994년 <동사서독>과 비교해 2008년 <동사서독 리덕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화가 시작하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 시기에 어울리는 ‘절기’가 소제목처럼 자막으로 덧붙여졌다는 점이다. 봄비가 내리고 싹이 돋아난다는 2월 18일 ‘우수’(雨水)를 지나 <해피 투게더>의 마지막 날 2월 20일이 찾아왔고, 그로부터 가장 가까운 절기, 그러니까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3월 5일 ‘경칩’(驚蟄)에 드디어 <동사서독 리덕스>가 시작한다. 구양봉(장국영)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다시 그 자신의 이야기로 회귀하기까지, 경칩에서 시작해 다시 경칩으로 끝나며 ‘순환’의 의미를 겹쳐놓으면서 ‘시간의 재’(Ashes Of Time)라는 영어 제목에 보다 충실한 느낌으로 완성됐다. 어쩌면 왕가위는 산천초목에 물이 올라 각종 벌레와 동물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장국영을 부활시키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왕가위는 <동사서독 리덕스>를 새롭게 재편집하여 내놓으며 마지막 장면을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장국영의 화려한 액션의 정지화면으로 끝냈다. 실제로 왕가위는 인터뷰에서 <동사서독 리덕스>에 대해 “떠난 장국영을 향한 뒤늦은 선물”이라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장국영의 유작은 <이도공간>(2002)이 아니라 <동사서독 리덕스>라 생각한다. 


   <해피 투게더> 이후 영화로 다시 만나지 못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었을까. 그래서 “다시 시작하자”는 그 대사가 두 사람 중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길 바라던 때도 있었다. 그만큼 그들이 다시 만난 영화가 보고 싶었지만, 장국영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 또한 일찌감치 영영 불가능한 일이 됐다. 그럼에도 <동사서독>에서 기억과 번뇌를 없애준다는 술인 취생몽사를 마신 구양봉의 말처럼,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계속>



  주성철 영화평론가

   前 「씨네21」 편집장 

   前 「필름 2.0」 기자 

   前 「키노」 기자

매거진의 이전글 <앙케이트 4> 나를 잠 못 이루게 만든 배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