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세르크] [친구]
대등한 자
[베르세르크]의 주인공 가츠는 떠돌이 시절, 매의 단이라는 용병집단과 얽히게 되면서 그곳의 리더 그리피스와 함께하게 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그리피스라는 남자의 야망을 위해 충직한 부하이자 동료로 살아온 가츠는 어느덧 매의 단에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실력파 돌격대장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피스의 암살 명령을 수행한 후 우연찮게 듣게 된 그리피스의 대화를 통해 가츠는 그의 인생은 물론 그리피스와 매의 단 전체의 운명까지 바꾸게 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결코 남의 꿈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정하고 나아가는 자... 그리고 그 꿈을 짓밟는 자가 있다면 전력을 다해 대항하는... 만약 상대가 나라 해도... 내게 있어 친구란 그런... '대등한 자'라 생각합니다."
샬로트 공주와의 대화에서 내뱉은 그리피스의 이 말에, 가츠는 큰 충격을 받고 매의 단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다. 그렇게 가츠가 매의 단을 떠나게 되면서 그리피스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무적이라 불리우던 매의 단은 일말의 사건에 휘말리며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가츠에게 있어 그리피스는 존경의 대상이자 그가 따라야 할 대장, 더 나아가서는 동료이자 친구, 자신과는 질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존재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그리피스의 대화를 엿듣었을 때의 심경은 허탈, 자괴감, 배신감, 수치, 자존심, 분노 등이 뒤섞여 어지러웠을 것이다. 반면에 그리피스에게 있어 가츠는 그의 꿈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이자 힘, 또한 그가 이끌어야 할 부하이자, 더 나아가서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런 그가 가츠의 결심을 저지하기 위해 (처음 그가 가츠를 가지게 된 방법처럼) 일기토를 붙고 결국 무참히 패배하게 되었을 때의 심경은 충격, 수치, 절망, 배신감, 분노 등으로 복잡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가츠가 떠나버려 계획한 꿈에 크나큰 차질이 생겨버렸다는 충격은 물론, 과거 자신의 무력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던 가츠가 이제는 단 한합만으로 자신을 꺾어버릴 정도로 강해졌다는 충격(즉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었고 자신을 눌러버렸다는 수모)이 더해져 이내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만약 가츠가 "네가 인정하는 대등한 친구가 되고자 매의 단을 떠난다"는 말을 전했다면 그리피스는 겸허히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그를 떠나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에 만약 그런 말을 듣고도 그를 붙잡아두려 했다면, 그리피스는 가츠를 친구보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가깝게 생각한 것이다.
친구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면서도 대등한 존재이며, 악한 것이 아니라면 친구가 원할 때 그것이 설령 내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그의 자유와 선택을 인정해 주고 받아들여주는 것이 친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한 거 없는 존재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
정말 친구끼리 미안한 게 없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끼리 미안한 게 있어야지 더욱 배려하고 생각하여 깊은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친구]에 나온 대사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 친구끼리 미안한 게 없다는 말이 아니다. 준석과 상택은 서로가 미안함을 알고, 또 그만큼 서로를 신뢰하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건달의 아들인 준석과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상택은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지만, 준석은 그런 상택의 환경과 모습을 부러워하고 동경했으며 그랬기에 둘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준석은 상택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보다 더 상택을 아끼며 생각하는 친구였다. 준석은 상택을 위해 진숙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고(애초에 준석과 진숙이 서로에게 끌렸음에도), 롤러장에서 상택을 도와 타학교 학생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된 일로 상택과 달리 학교를 무기정학 당했으나 상택을 일체 탓하지도 않았으며, 상택이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의 전세금을 가지고 와 준석과 상경하자고 했을 때도 "니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러면 안 된다"며 말려서 돌려보냈고, 한창 조직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면 들뜬 준석에게 "느그는 건달이 아니라 깡패새끼"라며 심한 언사를 내뱉었을 때도 이를 너그러이 웃어넘겼다. 반면에서 상택이 준석을 위해 실질적으로 해준 일이라고는(물론 우정에 무엇의 정도를 따지고 드는 것이 우습긴하지만) 준석이 마약중독으로 인해 제 몸을 못 가누며 힘겨워할 때 그를 찾아간 것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고 싶다는 그를 위해 준석을 부축해주며 추운 겨울 거리를 함께 걸었던 것 정도였다. 즉, 애초에 준석은 상택이라는 사람 자체를 매우 순수하게 좋아했다. 그것은 단순 우정을 넘어 동경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같은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라도, 정말 많은 순간 상택을 생각하고 용서하고 당연시 받아들여온 준석과 달리, 지난날 자신을 시작으로 벌어졌던 일로 인해 준석의 상황이 결국은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생각하며 울먹이는 상택의 대사는 그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결이 다를 수도 있지만 느낌만 따진다면 이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무한한 사랑을 바탕으로 미안해할 거 없다고 말하는 것과, 세월이 흘러 당연스레 느껴만 왔던 부모의 마음을 뒤늦게 느끼게 된 자식이 부모에게 미안해할 거 없다고 말하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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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붙어지내는 학창시절과 달리 사회로 나가 각자의 일과 위치를 책임지다보면, 아무리 친한 친구관계라고 해도 자연스레 멀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등 세상에는 친구에 대한 조언과 지혜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내가 먼저 상대방을 대등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과 미안함을 느끼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