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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앤 Aug 15. 2021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얼음팔이소녀

 태양은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려는 것 같았다. 어젯밤 신발을 도둑맞아 맨발로 나온 소녀의 발바닥은 지면의 열기 때문에 금세 화상으로 물집이 생겨 부풀어 올랐다. 할 수 없이 소녀는 뜨거운 햇볕을 막기 위해 머리에 두른 천을 벗어서 두 갈래로 찢어 발에 감았다. 이때 누군가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얼음 사세요.”

 소녀가 외치며 행인에게 다가갔다. 행인은 근처에 새 캠프를 짓는 오전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인 것 같았다. 캠프를 짓는 인부들은 캠프에서 지내는 이들 중에서 얼음을 살 여력이 되는 사람들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소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해 가버렸다. 소녀는 계속해서 거리에 서 있었지만 오후가 다 되도록 얼음을 사려는 사람은커녕 더 이상 오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는 얼음을 파는 다른 소년, 소녀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을 피해 캠프의 끄트머리까지 떠밀리듯 올 수밖에 없었다. 얼음을 팔지 못하면 소녀는 오늘도 굶어야 했다. 며칠은 더 견딜 수 있을 것이라 소녀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굶은 지 이제 겨우 사흘째였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때도 있었음을 소녀는 떠올렸다.

 “얼음 사세요.”

 다시 한번 외쳐보았지만 거리는 적막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모래폭풍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빠르게 다가오는 모래기둥은 순식간에 커졌다. 탐욕스럽게 소녀를 삼키려 쫓아오는 모래 괴물을 피해서 소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고지라서 공기가 희박한 데다가 그마저 매캐하고 탁해서 숨이 더 막혔다. 그날도 소녀는 사력을 다해 달렸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거대한 돔의 문이 보였다. 다급히 문을 두드렸지만 굳게 닫힌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소녀는 햇볕에 뜨겁게 달궈진 문 손잡이를 꼭 잡고 몸을 최대한 웅크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이 잠잠해지자 소녀는 웅크렸던 몸을 펴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래 기둥이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게 보였다. 소녀는 안도의 숨을 채 쉬기도 전에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했다. 얼음통이 바람에 날아온 녹슨 금속판에 부서져버리고 만 것이다. 더운 공기와 햇볕에 노출된 얼음들은 거의 다 녹아버렸고, 작은 얼음조각 몇 개만이 얼음이 녹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얼음통과 얼음을 몰래 빼돌려 소녀에게 얼음을 팔도록 한 얼음 창고지기는 얼음통을 망가뜨린 소녀를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었다. 그를 피해 도망치고 싶었지만 소녀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소녀는 돔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스노볼처럼 투명한 돔 안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물이 달려 있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눈을 굴리며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들, 신나게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등 돔 안에서는 이 겨울을, 크리스마스를 한껏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돔 안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은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소녀는 두꺼운 털옷을 입고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어린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달콤하고 부드러울 저 아이스크림을 한 입만 맛볼 수 있다면. 소녀의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 잊고 잊던 갈증이 한꺼번에 올라와 목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 내게 얼음이 있지.’

 소녀는 얼음통에서 작은 얼음조각을 꺼냈다. 얼음이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였다. 얼음을 입에 넣자 시원함이 입 안에서 식도로, 뱃속을 지나 온몸으로 전해졌다. 순간 소녀의 눈앞에 바닐라, 딸기, 초콜릿 맛의 아이스크림들이 놓여 있는 식탁이 펼쳐졌다. 상큼해 보이는 레몬 셔벗도 있었다. 어떤 것을 먼저 먹을지 고민하는 동안 입 안의 얼음이 다 녹자 눈앞의 아이스크림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힘이 빠진 소녀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어린 소년이 손가락으로 소녀 쪽을 가리키며 곁의 어른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러자 어른이 소년을 데리고 분수대 쪽으로 가버렸다. 높게 솟구치는 분수를 보는 순간 소녀는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거대한 해일이 순식간에 마을을 덮쳤고, 갈 길을 잃은 바다와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 도망치고 달려들며 순식간에 섞여버렸다. 물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소녀는 모래로 버석거리는 몸을 트럭에 싣고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과 이곳 캠프에 왔다. 조금 전 모래폭풍 때문에 소녀의 몸은 모래 투성이었다. 땀으로 끈적한 몸에 달라붙은 모래들은 아무리 털어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꺼끌꺼끌한 모래 때문에 따갑고 가려웠다. 소녀는 얼음통에서 얼음조각을 꺼내 이번에는 손과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시원한 목욕물이 있는 욕실이 나타났다. 그날 이후로 소녀는 물이 두려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물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 옆에는 깨끗한 수건과 보드라운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 놓여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비누향을 맡으며 목욕물에 손을 넣으려는 순간 손 안의 얼음이 다 녹으며 이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이마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위로 몸은 타들어갈 듯한데 오한으로 식은땀이 나다니. 물처럼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눈에 들어간 모래 때문에 소녀는 눈이 따가워 눈물을 흘렸다. 눈물과 함께 모래가 빠져나왔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눈물 사이로 눈밭에 누워 양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스노 에인절을 만들며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소녀도 눕고 싶었다. 그날 바다는 소녀의 집과 마을, 그리고 엄마, 아빠를 영원히 삼켜버렸다. 그때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소녀는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동안 쌓여왔던 피로가 해일처럼 한꺼번에 몰려왔다. 더위와 피로에 지친 소녀의 몸은 작은 불덩이라도 된 듯 뜨거웠고, 기운이 없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녀는 간신히 얼음통에서 얼음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러자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나타났다. 침대에 놓인 이불엔 작고 앙증맞은 새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소녀 방에 놓여있던 소녀의 침대였다. 방은 물에 잠기기 전과 똑같았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뒤뜰에 피었던 플루메리아 향기와 함께. 적도보다 북극이 훨씬 가까운 해안가에 열대의 꽃이 자란다는 걸 엄마는 신기해했었다.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입 안의 얼음이 다 녹아버렸고, 그 순간 방과 침대도 녹아내렸다.


 태양은 지치지도 않는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얼음통 안을 더듬었다. 얼음은 그사이 더 녹아 아주 작은 얼음 알갱이들 몇 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소녀가 간신히 얼음을 입에 넣자 소녀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짓는 엄마, 아빠가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 아빠! 가지 마, 나도 데리고 가.”

 소녀는 엄마, 아빠가 아이스크림처럼, 목욕물처럼, 침대처럼 사라질까 봐 조바심이 났다. 다급해진 소녀는 남아 있는 얼음을 모두 꺼내 입 안에 넣었다. 

 엄마, 아빠는 소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더위도 배고픔도 없는 세상으로 소녀를 데려갔다. 돔 앞에 웅크리고 앉아 죽은 소녀의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바람에 날아온 모래가 소녀 위로 조금씩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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