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세븐 시스터즈
내가 골라서 사놓은 옷들 중에서도 유독 더 마음에 드는 옷이 있듯이, 내가 선택한 여행지들 중에서도 더 마음에 품게 되는 곳들이 있다.
20대 동안 여행을 하면서 마주친 가장 큰 깨달음은, 나는 자연에 쉽게 흔들리는 편이라는 것이다. 흔하다 할 수도 있는 평범한 시골 목장 풍경이 나에겐 뉴욕 타임스퀘어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어릴 적 호주와 캐나다에 잠깐 살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푸르름이란 길거리 가로수 정도만 허락하는 도시에 살았던 나는 어린 나이부터 자연을 동경해 왔다. 자연의 힘을 부드럽게 관철시키는 지브리 애니메이션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한 영향도 있다고 봐야겠다. 영국 런던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온 세븐 시스터즈라는 바닷가 절벽은 20개국 40개 이상의 도시를 다녀온 지금도 아직도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런던에서 브라이튼을 거쳐 약 3시간 만에 도착한 세븐시스터즈 파크, 그리고 쿠크미어 해븐 절벽.
풍경을 보고 '경외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깍듯하게 깎인 절벽은 하얀 속살을 보였고 그 밑으로는 거짓말같이 깊은 바다가 펼쳐져있다. 런던이나 옥스퍼드와 같은 도시가 주는 감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구글지도가 알아서 길을 터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게 런던이었다면, 세븐시스터즈야 말로 모험 같은 여행이었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간단한 근교 여행 정도지만, 그 당시에는 혹여 실수로 다른 정류장에 내리거나 길을 잃어서 런던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꽤나 긴장했었던 것 같다. 런던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다음 일정도 모두 틀어지고, 결국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부모님께서도 많이 걱정하셨던 기억이 있다. 나이는 스물두 살이지만 외관상으로는 1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앳된 딸이 유럽여행을 한 달이나 혼자 간다니. "널 한 손으로 들고 납치해도 모르겠다"며 겁을 주던 부모님이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 그때의 내 사진을 보면 영락없이 순진무구한 아이였다.
세븐시스터즈 절벽은 그 어린아이에게 "나도 해낼 수 있다"라는 용기를 심어줬다. 이런 용기가 하나둘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
세븐시스터즈는 영국도 유럽도 아니었다. 그런 정의들이 생기든 말든 이 절벽들은 생겨나고 무너지길 반복할 것이다.
혼자 떠난 해외여행 중에서 처음으로 인간 문명이 보이지 않는 곳이 바로 세븐 시스터즈였다. 이때 깨달았다. 나는 인간계를 벗어나고 싶구나. 인간이 인위적으로 심은 나무와 꽃들 말고, 계획된 아름다움을 벗어난 우연의 선물과 같은 푸르름을 보고 싶구나.
이때의 깨달음이 몇 년 뒤 나를 키르기스스탄 이식쿨과 북유럽 페로제도 물라포수르 폭포, 페루 와카치나 사막으로 이끌었나 보다.
Seven Sisters, United Kingdom_ Key Word
- Cuckmere Haven
- Seven Sisters Clif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