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7 [7/28-8/3]
드.디.어. 마.침.내.
필리핀 세부 집 보증금을 다 받았다. 사실 다 받지도 못했다. 무려 26만 원을 남은 공과비와 청소비로 뜯겼다. 세부를 떠난 지 3달 반만이다. 그동안은 2600달러에 달하는 보증금이 세부에 남아있어서 내 영혼의 일부도 세부에서 돌아오지 못한 느낌이었다. 이제는 그동안 기다리느라 내적 상처 투성이더라도 더 이상은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천만다행이다.
그 외에는 말레이시아에 와서 가장 암울한 날이었다. 회사에서도 힘듦이 있었고, 퇴근하고 나서도 문득 내가 작년 겨울 부모님 앞에서 발표(?)했던 33장짜리 인생계획 PPT가 생각나면서 엄청나게 우울해졌다. 왜냐고?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대학원은 모두 떨어졌고, 토플 공부는 의미 없어졌으며, 추천서를 구걸하러 모교에 찾아간 것도 모두 소용없어졌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것 같아서 엄청나게 허무하다. 말레이시아에 온 이후 처음으로 눈물이 나더라.
갑자기 모든 게 거지 같다. 열심히 살아봤자 뭐 해. 늙어만 가는데.
수리아 TGV 영화관에서 <F1>을 봤다. Dolby Atmos관에서 봐서 그런지 사운드 퀄리티가 매우 좋았다. 유치하면서 재미없을 수가 없는 내용이면서, <탑건:매버릭> 감독 출신이라 그런지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쫄깃한 연출이 훌륭했다.
집에 돌아와서 화장실을 확인하니 며칠 전 발견했다 죽이지 못한 벌레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생긴 건 바퀴가 흡사한데, 크기가 매우 작았다. (파리만 한 크기) 지식인이나 방역업체 전문가들에게 분석을 부탁하기 위해 시체는 정밀하게 찍어서 남겨뒀다. 그리고 지식인에 올려뒀더니... 역시 빨리빨리의 나라 한국! 벌써 전문가가 답변을 달아줬다. Brown Band Cockroach라는 바퀴종이란다. 결국 필리핀에 이어 말레이시아에서도 바퀴 때문에 고생하게 생겼다.
벌레는 가장 큰 문제가, 한 마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집이 새집이고 내가 첫 입주자라서 지금까지 방심하고 살았는데, 벌레 차단을 확실히 해야 할 것 같다. 바퀴벌레용 연고약, 트랩, 나프탈렌, 제습제(습기제거용), 틈새막이 등 신경을 단단히 쓸 예정이다.
바퀴는 월계수잎과 계피 향을 싫어한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열심히 알아본 후 바퀴가 절대 살고 싶지 않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울였다.
*동남아 바퀴 박멸 & 처단을 위한 모든 방법들
1. 규조토 분말 바닥에 뿌려놓기 (바퀴가 살만한 공간 모두 뿌려두기)
효과: 바퀴벌레의 외골격을 물리적으로 손상시키고 몸의 유분과 수분을 흡수하여 탈수로 죽게 한다.
2. Bait(독먹이) 곳곳에 설치
효과: 바퀴벌레가 유인되어 독먹이를 섭취하게 하고, 이 독이 서식지로 돌아가 다른 바퀴벌레들에게도 전파되어 연쇄적으로 죽게 만든다(도미노 효과). 숨어 있는 바퀴벌레까지 제거하는 데 효과적.
3. 계피와 월계수잎 배치
효과: 바퀴벌레가 싫어하는 강한 향을 내어 접근을 꺼리게 만든다. 즉, 아파트 옆집에 살더라도 내 집에는 접근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 나프탈렌도 마찬가지로 바퀴가 싫어하지만, 나프탈렌은 인간에게도 해롭다.
4. 스프레이형 살충제 곳곳에 뿌려놓기 (곤충 성장 조절제(IGR) 포함 제품)
효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바퀴벌레를 즉시 죽이는 효과. 곤충 성장 조절제 (IGR)를 포함하면 바퀴벌레의 성장 및 번식 주기를 방해하여 알이 부화하지 못하게 하거나 유충이 성충으로 자라지 못하게 한다.
5. 습한 곳에 제습제 두기
효과: 모든 바퀴벌레는 물을 필요로 한다. 습기를 줄이면 바퀴벌레의 서식 환경이 덜 매력적으로 변하고, 생존에 필요한 물 공급원을 제한하여 개체수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6. 실리콘 틈새막이 (벽, 바닥, 천장의 미세한 균열들을 실리콘으로 꼼꼼하게 메우기)
효과: 바퀴벌레가 외부에서 집 안으로 침입하거나, 집 안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며 은신처를 만드는 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한다.
7. 배수구 정기적으로 뜨거운 물 부어주기 & 덮개로 덮어두기
효과: 배수구는 바퀴벌레의 주요 이동 통로이자 습한 서식처가 될 수 있다. 뜨거운 물은 배수구 내부에 있는 바퀴벌레나 알을 죽이고, 배관에 쌓인 음식물 찌꺼기 등을 제거한다. 그리고 쓰지 않을 때는 배수구를 덮개로 잘 덮어둔다.
8. 정기적으로 방역업체 부르기
이ㅈㄹ을 다한다 생각하면 생활비+정신적 손해를 합쳐서 사실상 한국에서 사는 비용과 큰 차이가 없다 느껴진다. 하지만 나와 같이 유감스럽게도 동남아에 살고 바퀴를 혐오한다면, 한 달에 한번 정도 정기적으로 방역업체를 불러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좋다.
세탁기 위에 둘 선반도 배송이 와서 한참을 조립했다. 처음에는 나사를 조일 도구가 없는 줄 알고 손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손수 조였는데, 알고 보니 육각형 임시 드라이버가 함께 들어있었다. 오래오래 살고 싶지도 않은 나라의 집에 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ㅋㅋㅋ 나도 이젠 모르겠다.
왜 끝이 없냐고? 소통과 배송이 전부 느리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하루배송, 새벽배송, 적어도 2-3일 배송 시스템이라면 이미 끝나고도 남았다. 하지만 집주인 부담으로 사는 가구는 중개업자 M과 소통이 숨 넘어가게 답답하고, 내가 부담하는 자잘한 소품의 경우 쇼피나 테무에서 주문하면 일주일 이상 걸릴 때도 허다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내 욕심이다. 길어봤자 몇 년 살 집을 마치 내 집처럼 꾸미고 있다. 밥 한 끼 더 사 먹을 돈을, 영상편집을 할 시간을 인테리어에 쓰고 있다.
이래서 돈과 시간 같은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나 보다. 20대 후반이 되니 갖고 싶은 대로 전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더 뼈저리게 느낀다. 옷도, 인테리어 소품도, 여행도, 취미생활도, 음식도, 월급에 맞춰 소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노동할 힘이 없어졌을 때 내 삶도 끝나버리는 수가 있다.
명백한 사실이 있다. 맛있는 걸 많이 먹는 행복을 선택하면 살이 찌고, 그 행복을 줄이면 예뻐지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당연히도 두 가지를 모두 가지는 건 마법의 영역이다. "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이라는 영어 속담처럼.
이번 주 쿠알라룸푸르에서의 금요일 저녁은 별다를 것 없었다. 콘도 헬스장에서 직장동료 Ray님과 운동을 하고, 늦은 저녁으로 닭가슴살 토마토 바질 냉파스타를 해 먹었다.
나는 요리에 자신이 없는 편이다. 재료를 고르게 칼질할 줄도 모르고,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다. 마침 며칠 전 각 잡고 토마토 바질 절임을 해놓은 게 있어서 그걸 이용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오늘의 메뉴를 정했다. 다행히도 Ray님은 정말 맛있게 먹어주셨다. 내가 언제 내 요리를 누군가에게 대접해 봤나, 생각해 보니 말레이시아에 오기 전에는 거의 그럴 일이 없었다. 한국의 좁디좁은 6평짜리 집에 친구가 놀러 와도 당연히 시켜 먹었고, 누군가 놀러 오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말레이시아에서 할 줄 아는 요리를 늘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내내 시달렸던 수면 부족에서 벗어난 토요일 늦은 오전에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만 같다. 제주 개오름 숏츠를 만들고 힌지가 고장 난 노트북을 수리 맡기러 파빌리온 쇼핑몰의 삼성 서비스 센터를 갔는데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분명 매장에 직원은 많은데 일하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고, 전혀 전문적이여 보이지도 않았다. 삼성폰을 쓸 적에 한국에서 갔던 삼성 서비스 센터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분들이 쭉 앉아계셔서 마치 전자기기 병원에 온 것 같았는데. 게다가 휴대전화만 수리하고 나머지 기기는 취급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혼자 씩씩거리다가 마이말레이시아 네이버 카페에 문의를 해보니 현주컴퓨터라는 한인 사설업체가 노트북 수리를 해준다고 한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몽키아라 근처라서 꽤나 멀지만, 가는 수밖에!
뜨거운 해가 질 무렵 Ray님과 티티왕사 호수 공원에 놀러 갔다. 자전거를 한 시간에 10링깃에 빌릴 수 있고, 자전거 도로도 있는 작은 한강 느낌의 공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자전거 도로를 지키지 않고 사람과 자전거가 뒤섞여있어서 속도를 내긴 힘들었다. 그래도 이게 얼마만의 자유인가! 작년, 방송국 퇴근 후 2시간 토플 공부를 하고 도망치듯 한강으로 가서 따릉이를 탔던 기억이 났다. 그땐 바람이 양 볼로 살랑이는 그 순간만이 유일하게 자유롭다 느끼는 순간이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꽤나 마음에 드는 공원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월요일 저녁 8시에 <20대의 20개국>이라는 브런치북을 발행하고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차분히 앉아서 글을 쓴다.
글을 모두 쓰고 나서는 직장 동료 Cha님이 알려주신 페탈링 자야 식물도매상으로 출발했다. 페탈링 자야(Petaling Jaya)는 서울로 치면 수도권 정도의 거리라서 택시비가 23링깃이나 나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식물 가격이 그리 저렴하진 않았다. 작은 홍콩야자가 15링깃으로, 한국에서는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가격보다 비슷하거나 비쌌다. 그리고 식물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있어서 자라는 방향이 엉망이었다. 부모의 관리 소홀로 머리 자를 때가 지난 아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정원 관리 용품이 많아서 식물에 관심 많은 식집사나, 인근에 사는 분, 차가 있는 분에겐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그 유명하다는 빌리지 파크 레스토랑에 가서 나시르막 아얌 고렝을 먹었다. 단돈 14링깃! 나시르막이 맛있어봤자 얼마나 맛있겠어했는데... 일단 내가 먹어본 나시르막 중에는 가장 맛있었다. 특별한 맛이라서가 아니라, 딱 적당한 맵기와 바삭한 치킨이 마치 기본을 잘하는 돈가스집에 온 기분이었다. 역시 국민 음식일수록 기본을 잘하는 게 중요한가 보다.
Cha님이 추천한 네일가게 Poppy Pops Nail Shop에 페디네일도 하러 갔는데, 간단한 마사지에 자석+파우더 네일을 했는데 100링깃 밖에 안 받았다. 가까우면 매달 받으러 갈 것 같다. 말차 사장님이 K드라마를 좋아하시는지, <구르메 그린 달빛>이 TV에 틀어져있었다.
우울하게 시작한 것치고 끝이 나쁘지 않은 한 주였다.
다음 주부터는 슬슬 인도네시아 롬복 여행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