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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Mar 13. 2024

아버지, 썰렁해요.

태클의 미덕

유머 감각이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굳이 황수관 박사의 '엔도르핀' 이론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웃으면 웃을수록 엔도르핀, 세로토닌 등 행복 호르몬이 나와서 사람의 건강을 증진시켜 준다고 많은 의학 연구에서 밝혀내고 있죠. 이 말은 곧, 사람들이 유머 감각이 풍부한 상대에게 끌리는 것은 생존본능이라는 설명이 되겠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조건의 1,2 순위를 다투는 것이 유머 감각이라고도 합니다. 재미있는 사람과 어울리다 보면 그의 지적능력이나 자신감 같은 걸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고 하거든요. 때문에 많은 연애학 코칭에서는 (그게 실전에 아무 쓸모가 없더라도) "오늘의 깔깔 유머"와 같은 농담 십여 가지를 외우게 만들기도 하죠.


'유머 감각은 곧 자신감을 나타낸다'라는 선입견에 의문을 가질 생각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에 있어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는 농담' 말이죠. 특히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는, 농담을 한 사람은 그냥 장난이겠지만 피권력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돌팔매질이 될 수가 있잖아요. 물론 저 역시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했을 때는 "우헤헤헤헤헤헷, 부장님, 아이고오오 크크크크크, 배꼽 빠집니다. 하하하." 하면서 윗사람의 농담을 받아내기도 했었죠. 아무리 유해한 농담이라도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한국의 권위적인 관계가 싫어서 온 캐나다에서도, 여전히 그런 권력자의 농담 때문에 기분이 망치는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예를 들면, 예전에 냉동공조 출장 수리를 다닐 때 선임기사에게 무슨 팁을 하나 배울 때마다 이런 얘기를 듣곤 했었죠. "너, 나한테 커피 한 잔 또 사야 한다. 이야~ 이제껏 도대체 얼마나 많은 커피를 빚진 거냐? ㅎㅎㅎ". 이번에 새로 온 시설 관리 팀장은 툭하면 (아무리 1.5배 수당을 받아도 야근이라면 질색을 하는 저를 잘 알기에) "~가 안되면 동선이 오늘 저녁 남아서 해결하겠지, ㅋㅋㅋㅋㅋ.. "라는 농담을 하는데, 정말 죽탱이를 날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물론, 농담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농담을 할 때마다 매번 자신의 힘을 시위하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겠죠.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노력이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케이스가 된 거죠, 그냥, 자신도 깨닫지 못한 채.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 역시 어딘가에서는 내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가 받아주기 힘든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어쩌다 보니까, 밴쿠버 사회에서 저보다 20년 정도 젊은 한인들의 모임에 자주 끼게 되었는데, 나름 젊은 사람들에게 재밌게 보여지고 싶다는 욕심에 휘두른 농담이나 섹드립들이 과연 TPO에 적절한 것이었는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아무리 캐나다라고 하더라도 한인 사회 내에서는 나이에 따른 지위가 암묵적으로 존재하더라구요. 젊은 사람들이 늙은 사람의 농담을 받아치거나 놀리는 일이 힘든 형편이거든요. 이런 상황이 되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부지불식 중에 권력관계를 느끼게 되는 거죠.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막말을 하는데, 우리는 반박하기 어렵네. 재미없다, 하고 말이죠.


즐겨 보는 가수 성시경의 유튜브 <먹을텐데>에서도 이런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매니저와 편집감독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인데, 고용주라는, 그리고 그 식사의 비용을 지불할 사람이라는 지위를 이용한 농담들이, 저로서는 무척 보기 불편하더라구요. 메뉴를 자기 임의로 결정하는 농담을 한다든지, 실수로 고기를 떨어뜨린 편집 감독을 비난하는 농담을 한다든지 말이죠. 알아요. 그들끼리는 이미 가족과 같은 친분이 형성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카메라 뒤의 성시경 씨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고용주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듣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전혀 지위를 이용한 장난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장면을 보는 저로서는, 현실 세상에서 서글픈 제 입장이 투영되어서 그런지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더란 말이죠. 그리고 저 말고도 사회의 수많은 '을'들이 같은 느낌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개그맨 신동엽은 아무리 더러운 농담을 해도 듣는 사람이 별로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잖아요. 저는 처음에 그게 무척 신기했는데, 그의 유튜브를 꾸준히 보면서 이제는 조금씩 알겠어요. 왜 그가 섹드립을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상찬을 듣게 되었는지. 기본적으로 그가 농담을 할 때 무척 수줍어합니다 (혹은 수줍은 척을 합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면서 내뱉는 농담들에게서 공격성을 느끼기는 힘들죠. 게다가 그에게는 최고의 태클 동반자들이 항상 있었어요. 때문에 단독 진행을 하는 각종 시상식이나 <불후의 명곡>보다, <마녀사냥>, <동물농장>과 같은 곳에서 그의 진가가 더 잘 발휘되어 왔습니다. 같이 진행하는 보조 MC들을 잘 활용해서 자신의 권위를 성공적으로 무너뜨리거든요. 더불어 그의 농담의 권력도 무너지죠. 특히 <마녀사냥>에서의 성시경, 유세윤 조합의 집요한 견제구는 신동엽이 쏟아내는 섹드립을 무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실, 저렇게 옆에서 적절하게 갈궈 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특히 무해하고 재미있는 연장자로 보이고 싶은, 내 농담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말이죠. 최근 '무해한 어른'으로 새롭게 조명을 받는 개그맨 지석진의 경우에도, 옆에서 유재석이 적절하게 갈궈 주기 때문에, 마음껏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겠죠. 강백호가 리바운드를 잡아주기 때문에 정대만이 3점 슛을 마음껏 던질 수 있었던 것처럼. 저 같은 경우에도 부부 동반 모임에서 주접을 떨 때, 아내의 돌직구에 무척 의지하는 편입니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하더라도, 못난 농담을 하더라도, 강력한 태클을 옆에서 받게되면 순간적으로 용서가 되는 느낌이 있거든요. 제 아내 같은 경우에는 신혼 초에 시아버지의 농담에도 "아버지, 썰렁해요."라고 일침을 놨던, 아주 대쪽 같은 성격이라서.


그렇다면, 만일 옆에서 권위를 무너뜨려줄 사람 없이 혼자 참석하는 모임이라면 어쩌냐, 혹은 부부가 같이 참석했지만 옆에서 견제구를 던져주기는커녕, 부창부수 꼰대질, 자랑질만 같이 뿜어내게 되면 어쩌냐, 이런 걱정들이 있죠. 안타깝지만 종종 부딪히는 현실이기도 하고요. 특히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내 말에 (내 의도와 상관없이) 권위의 무게가 실리게 될 때는 더 그래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지금으로서는 별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억울하지만 어쩌겠어요. 입을 최대한 닫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 제가 어릴 적에 좋아했던 어른들의 공통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게 조용하고 수줍어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어쩌면, 그들 역시 또래끼리 모이면 저질 농담도, 섹드립도 무척 심하게 하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말에서 손아랫사람들, 혹은 부하직원들이 권위를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별 방법 없이 입을 닫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무척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에요.

 



한 줄 요약 : 이제 덜 웃기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팀장은 자기 농담에 제 얼굴이 구겨지는 걸 눈치챘는지 이러더군요.


"컴온, 동선. 이거 다 농담인 줄 알잖아. 네 유머 감각은 다 어디 간 거야?"


대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대를 오히려 비난합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 사람이 사과도 제대로 못하는, 그의 태도가 실수가 아니라 천성이라는, 그렇게 수준이 떨어지는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오히려 해결의지가 사라집니다. 게다가 저런 농담에 태클 걸어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 자체가, 그가 그동안 얼마나 권위적으로 행동해왔는가를 말해주잖아요. 이쯤되면 뭔가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죠. 그냥 관계 단절이 답이겠거니 싶었어요. 서구 사회에서 일하면 이건 편하더군요. 친분은 친분이고 일은 일이라는 것. 그래서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난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현실적으로 너는 내가 원하지 않은 시간대로 내 근무시간을 바꿀 수 있는 권력이 있으니까. 너의 그런 농담은 나에게는 위계를 이용한 추행(harassment)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앞으로 하지 말았으면 해,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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