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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Aug 19. 2024

사랑의 재개발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 동상이몽 제작일지  #17

잠시 고린내 나는 옛날 얘기 하나.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애니메이션 작업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아직 셀 위에 고무 물감으로 채색할 때에는 발주업체에 따라서 납품방식이 달랐습니다. 보통 원/동화, 제록스와 칼라를 하청 받는 일본 일의 경우에는 커트 봉투에 작화지와 셀을 담아서 납품을 했고, 레이아웃에서 촬영까지 턴키로 하청을 받는 미국 일의 경우에는 촬영하고 현상까지 마친 필름 릴을 항공우편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커트 봉투가 되었건 필름 릴이 되었건 간에 제일 중요한 건 납기일자를 맞추는 거였습니다. 어차피 리테이크는 언제든지, 무슨 이유에서든지 오게 되어있는 거라서, 퀄리티에 실수가 있거나 하는 건 나중에 수정을 하면 되는 거였지만, 납기일자를 넘기는 건 비즈니스에 있어서 치명적인 신용을 잃게 되는 일이었거든요.


한 번은 미국 일을 하는데 도무지 납기일을 맞추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 벌여졌었죠. 한 여름에 도무지 추가로 사람들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구요. 당시 한국의 애니메이션 하청 산업은 미국이나 일본의 방송 일정에 맞춰서 수주를 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여름에는 일이 미친 듯이 바쁘고 겨울에는 무척 한가해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아무리 애니메이션 인력들이 매당 단기로 계산해서 돈을 받는 계약직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일이 몰릴 때는 사람을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그래서인지, 그 당시 하청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계약직 인력들에게 일을 줄 때 "도움을 받는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갈 때마다  피가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 같은 상황.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요? 촬영대에 아무것도 두지 않고 무지 상태로 카메라를 돌렸죠. 그렇게 현상까지 해서 납품을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후에 미국에서 리테이크 지시가 와요. "RETAKE - No Picture" 라고. 하지만 그렇게 일주일을 벌면 칼라랑 촬영까지 다 마칠 수가 있었거든요.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그림이 안 들어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납기일자를 못 맞추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꼼수였죠. 이메일이라는 게 없었던 구석기시대였으니 가능했겠지만요. 그래도 아무리 영세한 하청 애니메이션 업체라 하더라도 비즈니스에 있어서 납기기한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청 일이 이럴진대 방영일정에 맞춰 광고수주가 끝난 방송국 납품은 어떨 것이며, 극장에 개봉하는 작품들은 어땠겠어요. 데드라인을 못 맞추는 건 정말 영상 산업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죠. 전 사회생활을 그렇게 시작했었어요.



납기기한 준수를 다짐한 댓글




그런데, 이번에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상업 도서를 만드는 과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물론 제 한정된 경험이 한국에서 모든 출판물 제작에 적용되는 건 아니겠지만, 데드라인이 중요하더라도 작품의 품질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라고 할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걸지도 모르죠. 대자본이 투여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결합되어 진행되는 영상산업, 그것도 하청을 받아서 하는 일과,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나 혼자 컴퓨터 한 대로 작업하는 집필활동은 말이죠. 아무튼, 바로 직전까지 계속해서 고치고 또 고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해서 인쇄를 마친 책이라 하더라도 민디 작가님한테 또 오타가 딱 잡혔지만요. https://brunch.co.kr/@mindyleesong/267


재밌는 글을 쓰는 게 작가의 책임이다. Kazuhiko Shimamoto, Aoi Honō,  2007, Shogakukan


매의 눈 민디 작가님에게 딱 걸린 오타



각자 영화를 12개씩 고르면서 시작한 꿍꿍이. 당연히 내 생각을 정리하기 힘든, 다시 말해 글감이 잘 나오지 않는 영화도 있었겠죠. 그렇게 쓴 글은 아무래도 좀 티가 났었는데, 그러다 보니 몇 차례나 갈아엎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고친 두 개의 영화는 <죽어도 좋아>와 <바그다드 카페>였어요. <바그다드 카페>는 심지어 납품을 마치고 3차 교정본이 나온 후에 완전 새 원고를 써서 드리는 만행까지 저질렀습니다. 맨 처음에는 이연 작가님의 원고에 답글을 다는 기분으로 내 인생을 바꿔준 만남에 대해 썼다가, 다음에 '판타지'라는 장르에 리얼리즘이 섞인 것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쓰고, 그러다가 '우정'처럼 근거도 없이 추앙받는 인간관계의 휘발성에 대한 글로 바꿔서 납품을 했었죠. 그런데, 계속 '브렌다'라는 캐릭터가 눈에 걸리는 거예요. 영화 줄거리는 도무지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판타지스러웠는데, 전반부 내내 신경질을 뿜어내는 브렌다한테 관심도 가고 애착이 가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막판 뒤집기로 네 번째로 쓰게 된 원고가 <아줌마의 길>이었어요. 그녀의 까칠함에 전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글.


... 중략...
<바그다드 카페> 첫 번째 원고 - 바둑껌 히어로



<바그다드 카페> 두 번째 원고 - 판타지아



<바그다드 카페> 세 번째 원고 - 인연의 유통기한



<바그다드 카페> 네 번째 원고 - 아줌마의 길




<죽어도 좋아>의 경우엔 한 바퀴를 뺑 돈 셈이었어요. 처음 쓸 때부터 우리 사회에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너무 과대평가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마침 이연 작가님의 원고가 또 외로움에 관한 거였기도 하고, 인간의 삶의 기본은 '고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시점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삶에 있어서 인간관계의 디폴트에 대해 썼는데,  갑자기 개봉당시에 검열로 인해서 제한 상영관에서만 상영을 허락받았던 상황이 생각났습니다. 동시에 이 영화가 노인들의 성생활에 대한 인식 변화를 주도했던 것도 생각이 났었죠. 그래서 곧바로 첫 원고를 폐기하고 한국 사회에서 성생활에 대한 인식에 대한 글로 바꿨습니다. 제가 처음 본 빨간책이었던 <욕정의 불나비>라는 제목으로 해서. 그런데, 그게 또 6,500자가 넘어가더라구요. 참.. 원래 말이 많은 공산당인데, 소재가 또 섹스니까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포 떼고 차 떼가면서 계속 고치다가 결국 4,000자 규모로 줄여 놓으니까 무슨 논술 줄거리 요약처럼 되어 버리더라니까요. 핵심 논제만 줄줄줄 늘어놓은 것 같은. 결국 다시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좋아> 첫 원고 - 삶의 디폴트



<죽어도 좋아> 두 번째 원고 - 욕정의 불나비



다시 돌아온 외로움 이야기. <죽어도 좋아> 세 번째 원고 - 시소를 타더라도





  

그런데, 한 가지 슬쩍 내부정보를 흘리자면, 이 책에 글을 쓴 사람 중에서는 그나마 제가 가장 덜 고친 편이라는 겁니다. 누구라고 꼭 집어서 말씀드리진 못하겠지만, 저 말고 다른 작가는, 그야말로 악착같이, 막판까지, 수정을 멈추지 않았거든요 (맨 마지막에 원고를 완전히 바꾼 제가 딱히 불평을 할 건 아니지만). 공동집필을 하는 동안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서로 원고를 공유했었는데, 한 때 이 작가님의 블로그 카테고리 이름은 다 이런 식이었어요. "1차 수정", "2차 수정", "3차 수정", "4차 수정", "5차 잔못질", "잔잔못질", "잔잔잔못질", "마지막 잔못질", "누가 나 좀 말려줘요" (이 카테고리 들은 현재 다 증거인멸 당했습니다).  그리고 편집회의 때 주고받는 메일에서 가장 자주 언급된 말은 요기 베라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맘 좋은 편집장님께서는 그냥 허허허.


편집장 왈 : 계속 뭔가를 고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술 더 떠, 못질은 할수록 완벽해지는 거얌!



결국 인쇄소 넘기기 직전까지 최종 수정본이 반영되었는지 아닌지 그걸 확인하는 게 더 관건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각 꼭지별로 첫 페이지에 들어간 영화 흑백 컷도 마지막 순간까지 무진장 바꿨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흣흣흣흑흑흑흑 ㅠㅠㅠㅠㅠ (엉엉엉. 그 컷이 영화 속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도 장난 아니게 시간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구요 ㅠㅠ)



또 한 명의 작가의 명예보호를 위해 이름을 가렸습니다.


수많았던 수정고 카테고리들은 사라졌지만,  24개 최종고를 쓰기 위해 202개의 원고를 쓰셨던 기록은 남았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마감기한을 어기면서 계속 고쳐댄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 퀄리티의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누군가를 꼬발르거나, 음해하거나, 폭로하거나 그러려고 쓴 글은 아니었다구요.











덧 1, 어우. 속이 다 시원하네.


덧 2. 표지는 책 속 <파라노만> 포스터를 이번 출간기념회에 맞춰서 또 수정한 것입니다.


덧 3. 8월 24일 오전 11시 서울 시민청 동그라미 홀에서 조촐한 출간기념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폴폴 작가님 사회로 진행되고, 이연 작가님은 현장에, 저는 화상회의로 참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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