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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l 24. 2024

무엇엔가 미친 사람들

동선 이연작가님의 "영화처럼 산다면야"

특별한 책을 갖게 되었다. 마음대로 밑줄도 치고, 여백에 몇줄이라도 쓸수 있는 내책을 말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면, 얼마전 끝낸 한권의 책이 친구가 빌려준 것이라, 내것처럼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형광펜으로 밑줄은 그을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책은 친구도 보지않고 먼저 보라고 빌려준 것이라, 읽는내내 신경이 쓰였다.


책은 애증의 물건(?)이다. 가까이 했다가 멀리 했다가, 전자기기로 갈아탔다가, 점점점 내게서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새책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 보니, 보고싶은 책을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책 없이도 세상은 잘살아지고, 충분히 의미있게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랬는데, 우연의 기회로 새책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동선 이연님이 지은 "영화처럼 산다면야"라는 책이다. 이 책을 저자로부터 직접받았다. 작가님에게 "책을 구해보도록 노력해 볼게요"라는 한마디 말로 말미암아, 이런 일이 발생했다. 조용히 샀어야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말을 뱉어내기 위해 노력해야지, 하는 마음속 요구를 실천했더니 그런 일이 선물처럼 생겼지만, 동선 작가님은 내게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다른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책을 끝낸지 며칠 되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한다.


범접할 수가 없다. 두사람의 영화를 모티브로 한 토크쇼는, 사물을 보는 내눈이 얼마나 얕고 단순한지, 나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동선 작가님이 표지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미술가들은 무조건 존경. 사진같기도 한, 멋진 노을속 사람들. 춤추고 달리고 바라보고. 바라보는 남자는 기타같은 몸집을 지녔네.


오래전에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고 영화리뷰를 해놓은 적이 있다. 그 글은 다음 블로그가 종료되면서 T 스토리로 옮겨놓았는데, 다시한번 들여다봤다. 영화의 내용을 훑고, 한나는 글자를 모르는 수치심으로 인한 자존심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죽는 인물로 봤고,  마이클은 자신의 과오가 드러날까봐 신분을 밝히지 않는 비겁자라는 내용의 평이한 글이었다. 그 글을 쓴지도 15년이나 되었다는 것도 깨닫고.


그러나 이연작가와 동선 작가는 그런 평이한 영화감상자가 아니다. 이연작가는 더 리더를 보면서 현실을 짚고, 우리 시대도 그때만큼 혹독한 정치적인 역사현장이 아닌가 염려한다. 누군가를 도와야 하는데, 돕지 못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들, 전면에 나서서 싸우지 못하고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자신에 대한 애잔함등. 나는 이연작가의 첫편 "밑줄만"을 다 읽고 여백에 "무지가 무섭다"라는 글을 적었다. 요즘 내모습이 오버랩 되어서 말이다.


동선작가님은 글을 읽게된 한나가 책을 읽고 부끄러움을 느껴 스스로 단죄해서 죽었다고 말한다. 내가 파악해내지 못한 부분이다. "어쩌면 책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빨간약일지 몰라요"(32쪽)


책에서 언급된 영화중 한편이라도 보고싶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홍상수 감독의 "밤과낮"을 시청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제작자의 열악함이 엿보이는, 돈냄새가 배지않은 값싸게 찍은 영화라는 이미지가 내게 있는데, 그런 것들은 작은 단점이겠지. 동선작가는 현대창작자들에게 사회의 도덕잣대가 너무 높다고 지적하면서  "겁많고, 거짓말도 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욕정에 충실한 자연인으로서의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을 꺼내고 그걸 애정을 담아"(196쪽) 작품을 만드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의도라고 풀이한다.


"밤과낮"은 가방대신 비닐봉다리를 들고 다니던, 겁쟁이 화가, 도피인이자 바람둥이이자 아내바라기등 스스로의 본성에 충실한 한 남자를 통해서 동선작가가 말한 "예술가에게 인류가 나아갈 어떤 길을 제시해주길 바라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고 있는 홍상수 감독을 만난다.  사생활로 수년간 손가락질과 경시를 당하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나대로 살것이다,라는.


이 작품에 대해 이연 작가는 "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맹탕같은 그의 영화가 자꾸 보고싶고 생각날까? 아귀가 딱딱 들어맞지 않아 헐거워도 뜻밖의(?) 우연이 널리고 널린 세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의 영화에선 어디서도 맛본 적 없는 맛이 나는 것도 같아요"(203쪽)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이연작가는 글쓰기를 편들기로 말하기도 한다.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볼수 없는 이들의 눈이 되어어주고 만질 수 없는 이들의 손이 되어주고.. 나한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는 몰라도, 자꾸만 기울어요. 한쪽으로 쏟아지는 마음(201쪽)"이라면서.


동선작가는 영화에 미쳐 만들기까지 갔다가 위기로 쓰러질 찰나, 라면냄새로 기사회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 삶이지만, 영화처럼 사는 삶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책에는 그런 삶의 고비고비마다 그때를 깨우는 자각약(동선님에 의해서 알게된 단어)이 있다는 것, 영화는 스크린안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네 삶속으로 걸어들어온다. 두 작가에 의해서.


오른쪽 그림은 동선 작가님이 그린 스캐니메이션이다. 검은 줄자같이 생긴 책갈피를 대고 아래위로 흔들면 두 남녀, 혹은 몇명이 춤추는 연속적인 동작을 확인할수 있다. 


두사람의 영화읽기는 기억의 창고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기억은 섬세하고 미려하다. 창작자의 마음으로 살지않았다면 넘보지 못할 영역이라고 하자. 왜냐하면 평범한 나를 괜찮게 여기려면 그수밖에는 없다. 그렇지않으면 왜 나의 기억은 그리 휘발되었으며, 인생을 치열하게 살지못했느냐고 나를 책망하게 될것만 같다. 


이연작가의 필체는 특이하다. 한번에 스르륵 읽히는 문장은 아니다. 곳곳에서 그녀가 전문 창작자의 삶을 살수밖에 없다는 문장들이 읽힌다.


"풍부한 상상력 덕에 혼자 있어도 심심할 겨를이 없어요. 심심함은 또 다른 놀이. 외로움은 영혼의 액세서리. 우울은 자양분. 고독은 스승. 아픔을 오래 달고 산 몸. 죽음과 오랜 눈 맞춤. 어느결에 해체된 시공간, 사라진 경계, 흐릿한 선. 붕괴한 질서."(135쪽)


"일분일초라도 더 쓰고 싶은 내 사나운 욕망. 밤낮없이. 꿈에서도, 손끝이 키보드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 그 리듬감."(183쪽)


"영화처럼 산다면야" 책은 나와 이리저리 여행다녔다. 어쩌다 9시간 일하는 날에는 1시간 점심시간이 주어진다. 일값을 주지않는 나의 고유시간이다. 15분씩 브레이크 타임을 갖다가 1시간이 주어지면, 그 시간은 황홀할 정도로 풍족해보인다. 그 시간을 위해 책을 들고 출근하는 날은 좋아서 입술이 씰룩거린다.  어느때는 풀뽑으러 밖으로 나가서 풀뽑기와 책읽기를 병행한다. 그 시간도 좋았다.


두 사람의 독특한 글쓰기 우정이 돋보인 책이다. 그런 우정이 가능했던 것은 영화에 미치고, 글에 미치고, 창작에 미친 두사람이기에 그랬을법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에 천착하고, 마음을 다해 거짓없이, 아픈 누군가에게 "빨간약"으로 소용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썼을 것 같다. 맞는듯 맞지않는듯, 찬양도 아니고 비판도 아닌, 공감과 덧붙임의 긴 대화를 나눈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고 보인다. 제작일지가 현재진행형으로 연재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만.


그렇게 오묘한 깊은 대화의 바다가 아니라, "수다"라는 작은 웅덩이에라도 빠져볼 방법이 없을까, 고민인 내게는 두사람이 이해불가로 다가온다. "말많은 공산당"인 그들이 부럽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 글을 끝낼 즈음에는 "나는 나대로"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입이 둔하고, 내 이야기 만들어내기에는 서툴지만, 이렇게 한편 리뷰도 작성했으니, 너는 너대로 족하다 하면서 나를 토닥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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