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점의 일상
며칠간 트레이닝을 받던 그녀가 엊그제는 내 자리앞 레인에서 손님을 맞았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인도에서 온 그녀는 곧잘 한다. 모르는 것은 내게 물어본다. 가르쳐줘서 고맙다는 한마디에 더욱 힘이 나서 도움을 주려고, 막히는 것 없는지 간간이 그녀를 살핀다. 그러다가 플루(Plu #) 코드를 물어오면, 멋지게 읊어준다. 가령 아보카도는 4046이고 배추는 4552를 눌러야 한다. 아보카도는 개수로 배추는 무게로 가격이 나오는 것도 따로 알고있어야 한다. 자몽은 4285인데, 나의 초보시절 무게로 나오는 줄 알고 4개쯤 사가는 사람에게 한개값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게 갯수인가, 무게인가 혼란스러워 하는 내게 손님은 무게로 하는 것이라고 알은체를 하여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경험이 있다. 바코드가 없는 야채, 과일등은 플루 코드를 가졌는데, 그 PLU는 무슨 뜻인가 지금 찾아봤더니 Price Look Up(가격조회)의 약자라고 나와있다.
시간이 가면 플루번호가 외워지긴 하지만, 모를때는 바인더를 찾던지, 컴퓨터에서 찾아야 한다. 손님들은 지체하는 점원을 말없이 기다려주는데, 정작 일하는 본인이 마음이 바빠지게 마련이다. 아주 드물게 사가는 식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외우게 된다. 24병들이 생수를 사가는 사람들이 많다. 무게가 나가니 카트에 놓고, 바인더에서 해당 바코드를 스캔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바인더를 열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다른 음료수들도 마찬가지지만, 그야말로 물은 너무 자주 나가는 품목인데 그 바코드를 외울 생각은 하지못했다. 그런데 몇몇 식품점의 "선수"들이 바코드를 외워서 치는 것을 봤다. 그 숫자가 무려 10자리수가 넘는다. 그래서 나도 한번 시도해봤다. 06038375938 아마 맞을 것이다. 그렇게 외웠더니 한결 편해졌다. 예전에는 많이 파는 품목은 바코드를 오려놓고, 스캔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일절 그런 것들을 데스크에 놓지 못하게 한다. 스캐너가 실수로 읽을 수가 있고, 그러면 여러 혼돈이 오니 말이다.
초기에 플루코드를 외울 때, 몇가지는 스토리를 동반했다. 그중 4083이 흰감자인데, 주요 야채 앞자리가 40이므로 그것은 따로 외울 노력을 하지않아도 되지만, 뒷자리는 83학번이던 얼굴이 하얗던 후배를 대입했더니, 흰감자를 팔때마다 그녀가 떠오른다. 그녀에게 미안하다. 혹시 다시 만날 일이 생기면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리라. 너무 안외워지는 것들은 그런식으로 연상작용을 통해서 번호를 외웠다. 종류가 많은 사과 같은 경우, 한알한알에 모두 plu넘버를 단 스티커가 붙어있다. 하필 스티커가 없는 것을 고객이 가져올때, 그리고 그 품목이 바인더에 없을때 야채담당자를 부르고 그가 올때까지 일을 잠깐 멈추게 된다. 순조롭던 흐름이 끊기는 순간이다. 그 페이지하기의 어려움은 예전에 한번 쓴 적이 있다. 내 발음 때문에 아무도 못알아듣고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했다. 새로 온 사람들을 보니, 모두 나같은 시기를 지난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고, 익숙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이제는 내가 대신 해주기도 하고, 더 나아가 페이지 버튼을 누르고 사람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 시연을 하기도 한다.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입쪽에 대고 말해야 명확하게 전달된다. 일은 숙달의 문제이지, 내가 멍청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트레이닝을 받고 모두가 정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러시아에서 온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는 그로서리 파트에서 일했는데,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 내게 관심을 보였다. 식품점에서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특별히 조금 화려한(?) 인상이었다. 아들과 함께 일했는데 아들도 훤칠하니 키가 컸고, 인사성이 밝았다. 브레이크 타임에 가끔 보면, 엄마와 아들이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펴놓고 피크닉하듯 함께 먹는 모습이 조금 특출나다. 우선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무언가 마음먹고 먹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환경인지라, 눈에 띄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왔다고 했고, 그곳에서 피아노 선생을 했다고 했다. 겨울의 어느날 집에가는 그녀를 보니, 굽높은 가죽부츠에 밍크코트를 입고 있었다. 마치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는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어느날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로서리 매니저가 그녀에게 "쉬는 시간을 마음대로 늘리면 어떻게 하느냐"며 퉁명하게 말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휴식시간이 끝났는데도 늦장을 부렸나싶다. 나도 민망했다. 1분을 계산하는 식품점의 생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15분, 30분, 1시간 휴식이 있는데 그 시간에서 1분만 벗어나도 눈에 드러난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같아도 모두가 보고 있고 특별히 관리자들은 감시아닌 감시를 한다. 나도 잠시 오피스에서 일해보니, 한사람의 휴식시간이 끝난 후에 뒷사람이 가야하기에 시간을 재게 된다. 고객을 받느라 내가 쉴 시간을 놓치면, 도미노로 시간이 늘어지게 된다.
그런 타박을 받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 그녀와 아들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적응해보려고 했는데, 그녀에게는 조금 힘든 직업이 아니었나싶다. 언성을 높이며 카랑카랑하게 혼을 내던 필리핀 출신 그 매니저가 좀 고약했다 싶기도 하다. 말이 나온김에, 백인 위주인 동네였는데 최근에 유색인종이 많이 늘었다. 우리 식품점만 해도 타일랜드, 필리핀, 인도, 중동 사람과 한인인 나까지 일하고 있다. 전체 인원이 15명쯤 되는 것같다. 러시아에서 온 그녀는 얼굴은 백인이지만 역시나 영어가 약한 이민자 출신이니 미숙련 저임금 노동인 이런 일은 은퇴자나, 다음 단계를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되는 것같다. 필리핀 남자와 타일랜드 여자는 현재 매니저까지 되었으니 나름대로 성공(?)한건 아닌가 싶지만, 일은 쉬워보이지 않는다. 필리핀 매니저가 다른 동료들과 하는 대화를 엿들으니, 수년간 월급이 오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식품점에서 풀타임 직원은 손으로 꼽을 정도니, 이지 컴 이지 고잉(easy come easy going) 잡인 것은 맞지만, 우리 식품점의 분위기는 그다지 나쁘지 않아 오래 일하는 것이 아닌가싶다. 장애인도 몇명 일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정부에서 회사에 보조를 해준다고 들었으나 잘 모르겠다.
한편 매니저들은 손님이 밀리는 상황이 되면, 휴식시간을 조정해서 보낸다. 쉬는 시간이 보장되긴 하지만, 현장상황에 따라서 시간은 들쑥날쑥해진다. 6시간 일하면 2시간마다 15분씩 쉬어야 하지만, 어떤때는 3시간 내내 브레이크 타임 통보를 못받는다. 그래서 두번 나눠 쉴 것을 합해서 1회, 30분 브레이크 타임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쪽에서 밖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 30분 타임을 원했더니, 매지저가 바로 내맘대로 그렇게 할수는 없다고 제재해서 기가 막히기도 했다. 이제는 초연해서 좀 늦게 브레이크 시간이 오면 후반전 일이 줄어드는 셈이라 나름대로 좋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이렇게 체제 순응적인 사람이라니, 나도 내가 질린다.
식품점의 하루는 같은듯 매일 다르다. 장보는 일이 조금이라도 즐거운 일이 될수 있도록 스무스하게 진행되어야 하는데, 가령 싸인이 4달러여서 집었는데, 계산할때 5달러로 나오면 태클이 들어온다. 그러면 담당자를 찾아야 하고, 가격을 확인하게 한다. 대부분은 할인기간이 끝난 싸인을 떼내지 못해서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러면 식품점의 잘못이므로, 그 가격에 손님에게 팔고 그 싸인을 없앤다. 어떤때는 믿지못할 정도로 낮은 가격에 파는 물건들도 있다. 물건에 큰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닐때 손님들의 얼굴에 퍼지는 웃음을 보는 재미가 있다.
예사롭고 조용히 쇼핑하는 사람들이 거의 90%가 되는 것같다. "How are you?"는 기본인사이고, 대답과 상대방에게 다시 물어보는 것이 예의다. 나는 주로 "Hi"로 시작하는데, 기분에 따라서 "How are you?"를 던진다. 되도록 말을 적게 하려는 편인데, 가끔 날씨 이야기, 물가이야기 등으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도 한다. 캐롤이 일하는 날에는 어깨너머로 쩡쩡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리아파 수술한 이야기, 개 데리고 산책한 이야기등 짧은 시간에 손님과 대화삼매경이다. 나이가 많은 캐쉬어중 한명은 다리수술을 하고 얼마전 복귀했다. 6개월간의 재활기간이 끝나고 말이다. 그정도면 집에서 쉴만도 한데, 다시 돌아온 그녀가 놀랍다. 키높이 의자에 앉아서 일하는데, 그리 편해보이지 않는다. 겉으로 봐서는 70세가 훨 넘어보이기에 연금으로 생활하면 될것 같은데, 아픈 후에라도 기어이 복귀하는 그 마음을 잘 모르겠다. 다른 나이많은 캐쉬어들에 비하면 나는 생생한 편이다. 나의 경우, 작은 변수라도 생기면 미련없이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겉에서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데, 내가 나이가 더 들어가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날은 한 남자고객이 사는 물건중에 생리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럴 수 있기에 묻지도 않았는데, 그 생리대를 사는 이유는 푸드뱅크용 큰 카트에 넣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계산을 끝내고 나가는 뒷편에 푸드뱅크에 갈 큰 카트가 놓여 있는데, 손님들이 가끔씩 그곳에 구입한 시리얼박스나 캔 음식등을 넣는다. 그는 이런 품목(생리대)이야말로 정부에서 무료로 나눠줘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필수품을 돈을 받고 구입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면서, 정부라면 그런 일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큰소리로 말했다.
계산할때 가격이 찍히는 화면을 뚫어져라 보는 사람은 대부분 두종류이다. 한쪽은 캐쉬어가 제대로 찍는지, 가격이 확실한지 알고자 하는 꼼꼼한 사람들이고, 한쪽은 가지고 있는 돈과 계산이 벗어나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카운터에 물건을 다 놓지못하고 하나씩 보태면서 지불할 금액을 확인한다. 한번은 27달러가 넘으면 알려달라고 해서, 말해줬더니, 잔돈이 조금 더 있다면서 2알 가져온 토마토중에 한알과 35센트짜리백 한개를 살수 있겠다 한다. 그렇게 계산을 끝냈는데 뒷사람이 그사람이 살수 없어서 돌려준 물건들을 자신의 계산에 넣으라고 말한다. 방울무, 빵, 토마토 한알등, 그렇게 바로 뒷사람이 계산해서 그사람에게 주었다. 그녀는 당황해하면서 그 물건을 받아 떠났다. 빵까지 내려놔야했던 그녀를 도와준 이웃이 새로이 보인다.
어떤 날은 무슨 문제인지 카드 결제가 안되는 경우도 있있다. 물건은 많이 샀는데 그냥 놓고 가던지, 어떻게 해야하는데 그렇게 당황한 그녀에게 뒷사람이 자신이 지불해 줄테니, 이트랜스퍼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150불이 넘는 금액이 나왔는데, 그녀를 믿고 해준다는 사람이 신기했다.
다른 식품점 광고에 나온 할인품목과 가격을 맞춰주는 "프라이스 매치" 제도가 있다. 똑같은 품목이어야 하는데, 어느날 다른 회사의 수박가격으로 달라고 광고지를 보여준다. 수박이 세 종류가 있는데 그녀가 가져온 것은 가장 큰 타원형의 수박이었다. 광고지에서 보이는 건 중간 크기 보통의 것 같아 보여서 설왕설래하는데, 결국 매니저까지 부르고 해야했다. 가장 큰 수박, 씨있는 프리미엄 수박이기 때문에, 광고지와 맞지않는다고 하는데도 계속 같은 논리로 우겨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녀는 너무나 우아하게 차려입고 화장도 화려하게 한 인도여인이었는데, 같은 종류의 수박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계속 우겨서, 뒷사람들이 모두 다른 레인으로 옮겼던 기억이 난다. 그 고객이 나의 고객은 아니었는데, 마치 큰 일이 난것처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식품점엔 노인 고객이 많이 찾아온다. 고객중 한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분에게서는 매번 같은 대답을 듣는다. "나는 매일 느려지고 있어." 이렇게 말이다. 짠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하는 그 할아버지를 볼때 미소가 지어진다.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의 업무처리 능력(?)은 많이 다르다. 단말기에 크레딧 카드를 탭하는 것도 쉽지않다. 적어도 몇초는 단말기에 대고 있어야 하는데, 휙 스치기만 하는 사람도 있고, 손이 떨려서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기도 하고, 인내를 갖고 그런 일이 진행되는 걸 도와야 한다. 어떤 사람은 탭하면 그래도 쉬울 것을 카드를 집어넣고 번호를 넣느라고 고생한다. 탭하면 자신의 돈이 다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단추를 늦게 누르거나 잘못 눌러서 에러가 난다. 왕성했던 옛시절을 생각하면 한심하겠지만, 매일 슬로우해지지만 아직도 장을 보러 오실 정도이니, 다행이라 해야하나. 그분들의 젊은 날을 생각하면서, 나의 늙은날의 모습을 투영해본다.
어느날, 참으로 지루하고 회색의 느낌으로 캐쉬대에 서있었다. 이 지루한 일을 얼마나 오랫동안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집에와서 "힘든" 표정을 냈다. 아마도 그날 반성을 했던 것같다. 내게 주어진 일을 할수 있을 때까지 감사함으로 하자고. 오후에 일하기도 하고, 오전에 일하기도 하고. 원하는 날은 일을 뺄수 있다. 또 자동으로 스케줄이 없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 아침에 전화가 올때가 많다. 오늘 나와줄 수 있겠어?라고. 그러면 별일이 없으면 일하러 간다.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풀타임이 아니니, 시간에 쪼들리지 않고, 일할때 열중하면 그 이후에는 아무런 스트레스가 없다. 매주 스케줄이 조금씩 달라서 정신차려야 하는 점은 내게 좋다. 시간을 착각해서 일찍 갔던 적도,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니 전화해서 부리나케 달려간 적도 있다.
환불이라든가, 계란이 떨어져 깨졌다든가, 블루베리 용기가 열려 온 사방에 떨어졌을 때 등 어떤 일이 발생했을때 그런 일을 해결하는 시간들이 마디가 되어 시간이 리듬감있게 흘러가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일이 발생한 것은 더이상 짜증나고 귀찮은 것이 아니라, 지루한 시간을 돌파할 작은 이벤트로 생각하면 또 즐겁기도 하다. 우유가 새는 것을 발견해서 유제품 직원을 불러 바꿔준다거나, 약간 썩은 과일을 살때, 그걸 알려주고 바꾸던지 빼놓고 가게 한다든지,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을 시정할때 모래만한 보람이 있다. 식품점의 선수들은 그런 마인드로 일하는 것이 아닌가싶다.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아주 지루하고 진상인 손님에게 스트레스받는 직업이 되는 것이고. 나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체제순응이 너무 질리도록 심한 인간이다. 이 환경을 피할 그럴싸한 플랜이 나오기까지는 즐겁게 일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나를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