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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Nov 20. 2024

작별하지 않는다

사랑에 관한 소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난 후의 첫 소감은 4.3 사건을 알아봐야겠다였다. 역사를 잘몰라, 좋아하지도 않아, 이렇게까지 말하곤 했다. 현재를 잘사는 것이 역사를 몰라도 되는 이유라고 항변했던 것같다.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이번에 조금 더 알게 됐다. 그 역사안에 있는 이야기들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얹힌 것처럼 속이 불편하다. 그런 까닭으로 알고싶지 않았던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의 역사에 대한 무지했던 "과오"가 덮어지는 것도 아니고, 역사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제주 4.3은 어떻게 불러야 하나, 항쟁? 민주화? 투쟁? 그 무엇이라고 말할수 없어서 제주 4.3 사건이라 불리는 것같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사건의 일부분을 다룬 소설이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우선 내가 찾은 4.3 사건을 나누기로 하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간략하게 4.3 사건을 이렇게 설명해놓았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이 주도한 총파업, 경찰·서북청년단의 검속·탄압, 남로당의 무장봉기, 계엄령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 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사건은 1954년에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제주 평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는 막대한 분량의 정보들이 들어가 있었다. 나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문제이기도 하지만, 군부정권에서는 4.3 사건을 언급하는 것도 막았다. 4.3 사건이 수면에 드러나게 된것이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라는 것을 자료들을 통해서 알게된다. 4.3 평화재단에서 배포하고 온라인으로도 열람이 가능한 책의 첫장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역사의 동굴로 가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자연과학 분야에

서 3관왕을 달성할 정도로 보기 드문 풍광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찬란한 풍광 이면에 한과 눈물로 점철된 역사가 있다. 제주인들은

70여 년전, 해방공간에서 남북분단을 막으려고 온몸으로 나섰다가 참혹한 희

생을 치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반세기 동안 ‘없었던 역사’처럼 그 진실이 은

폐됐다.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 제주도는 한때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

지만, 그 후 오랫동안 역사의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금단의 섬이기도 했다.

그러나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제주사람들의 기억투쟁은 계속

됐다. 제주시 봉개동에 자리잡은 제주 4·3 평화공원은 그 투쟁의 결정체이다.

공원의 핵심시설인 제주 4·3 평화기념관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4·3을

담은 진실의 그릇이다. 지하 1층에 마련된 상설전시실은 4·3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꾸며졌다.


1948년 4월3일이라는 한날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7년7개월에 걸치는 긴 시간 동안 제주도민의 학살이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제대로 추모할 수도 없는 역사의 질곡에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기본 맥락을 가지고 책을 들여다보자. 어쩌면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민들이 그 역사를 잊지않기 위해 투쟁했던 제주 4.3 기억투쟁이라고 해도 될것같다. 제주 평화재단뿐 아니라 제주 4.3 연구소등, 문민정부 들어서 새로 연 민간연구소등, 많은 곳에서 4.3의 자료를 모으고, 대중들에게 나누고, 유족들의 한을 치유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역사는 묻을 수 없다.




소설은 3부로 되어있고, 1부와 2부는 6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제목들이 눈길을 끈다. 최소한의 단어를 사용한 것 같은 느낌. 단아하면서 단호한, 여리지만, 그것이 폐부를 찌를지도 모르므로 주의해야할 것 같은. 이런 느낌은 아마도 내가 책을 다 읽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1부 새"에는 결정, 실, 폭설, 새, 남은 빛, 나무가 있고, "2부 밤"에는 작별하지 않는다, 그림자들, 바람, 정적, 낙하, 바다 아래 그리고 3부는 불꽃이라는 하나의 챕터로 마무리된다.


1부 결정, 이렇게 제목을 읽는데 탁 막혔다. 나의 머리속에는 "무엇을 결정하다"할 때의 그 결정이 이미 들어와버렸는데, 그옆에 조그만 글씨체로 결정이란 한자어가 붙어있는데 자세히 보니, 무엇을 결정할 때의 그 의미가 아니라, 눈의 결정체 할 때의 그 결정이었다. 첫 도입부터 긴장하게 된다.


소설은 현실과 꿈, 혹은 상상이 넘나들고 있어서 주의 깊게 봐야했다. 주인공(글쓰는 이)은 더이상 돌볼 가족도 일을 할 직장도 없는 상태가 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되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한다. 그녀는 어떤 도시(광주)의 학살에 대해 글을 쓴적이 있다. 그후로 묘비같은 통나무들에 대한 꿈을 꾼다. 몇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제대로 된 유서를 쓰고, 그 유서를 담당해줄 최소한의 한사람을 찾는다면, 바로 죽고싶다고 생각했던 경하라는 여성이다.


제주도에 살며 목공일을 하던 친구 인선이 톱에 두 손가락을 잘리는 사고를 당하고, 친구인 경하에게 자신이 있는 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경하는 본인도 추스리지 못하는 심리상태인 채로 친구를 돕기위해 가는데, 친구의 부탁은 자신이 키우는 "새"가 먹이가 없어서 죽게 됐다면서 그를 살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친구의 부탁으로 제주도에 내려오지만, 폭설 때문에 죽음 가까이 가게 되기도 한다. 인선의 집은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 있었다.


한라산 중산간 마을은 4.3 사건때 매우 중요했다. 무장공비들에게 편의를 봐줬다고 마을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마을이 소개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한라산은 금족지역이기도 했다. 인선의 가족들이 그 참혹한 역사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경하는 어느날 꿈에서 바닷가, 뼈들, 묘비같은 통나무들이 있는 악몽을 꾼다. 그 꿈이 그전에 쓴 도시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나중에 들게 되고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아 인선과 함께 꿈에서 본 그일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는 와중에 경하는 의식적인 작별뿐 아니라,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작별들도 하게 된다. 그 프로젝트를 없는 일로 하자고 인선에게 말한다. 자신의 착각이었다면서.


인선의 사고를 시작으로 경하가 겪게 되는 일을, 꿈속인 것처럼, 생시처럼 소설은 묘사하고 있다. 인선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겪었던 학살과 제주도의 수난이 인선의 어머니에 의해 증언되고, 자료를 찾아 보관된다. 인선은 나중에 엄마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어, 엄마가 했던 일을 이어서 하게 된다. 자료모으고, 증언자들을 찾아다니고 마지막으로 경하와 같이 하고자 했던 나무묘비를 세우는 일. 그들은 이것을 나무를 심는일,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역사의 폭력안에서 죽어간 영령들, 그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피토하는 심정을 인선과 경하라는 인물을 통해서 새롭게 기억되는 장면들에 대한 서술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누구든, 쉬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낼 수 없으며, 이땅에서 벌어진 그 질곡의 역사에 대해서 피흘리는 심정이 된다.


인선의 두 손가락은 잘려서 봉합이 되었지만, 그쪽으로 흐르는 피의 통로가 막히면, 다시 썩어들어가서 잘라내야 하든지, 온몸을 마취하고 재수술을 하든지 해야한다고 말한다. 피의 통로가 막히지 않게 하려면, 그 상처가 굳지 않게 계속 피를 흘리게 3분에 한번씩 주사바늘로 찔러주어야 한다. 이 장면을 세세히 그린 것은 상처를 묻어두어서는 안되며, 피를 흘리더라도 생살에 계속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해석이 된다. 내 손가락 잘린 것이 그럴진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산채로 죽어나가고,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희미한 사람들을 찾는 유가족들의 아픔을 짐작하게 해준다.


인선은 처음에 "새"를 살리기 위해서 친구에게 제주도에 내려가라고 한다. 가족처럼 살았던 "흰 앵무새" 때문에 친구인 경하는 죽을 고비를 하면서 제주도에 가게 되는데, 이것도 "새"라는 미물도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목숨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 누군가의 부모, 자식, 형제자매의 죽음에 수십년 동안 말한마디 못하고 살아내야 했을 그 가족들의 고통으로 생각이 넓혀진다. 인선의 어머니는 학살된 사람들의 뼈를 본후로, 그중에서 도망친 한 청년이 있다는 증언자의 말을 들으며, 마침내 정신이 분열된 것 같다고 인선은 진단한다.


소설은 눈과 새 등 흰것에 대한 탐색이 뛰어나다. 눈을 새의 깃털로 묘사한 부분도 많고, 부드럽고 가벼운 새의 무게를 눈에 비유하기도 한다. 눈은 학살당한 사람들이 누워있는 곳을 덮었던 그눈이었고, 그 눈을 하나씩 걷어내어 가족의 얼굴을 확인해야했기에, 가장 가슴아픈 강력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그 사이로 떨어진 햇빛에 눈송이들이 빛나는 것이다. 해수면이 반사한 빛이 거기 곱절로 더해져,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가 바다 위로 쓸려 다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거다.(59쪽)


인선과 경하는 각자의 삶에서 죽음같은 절망을 맛본 사람들이다. 인선은 책안에서 작가로 나온다. 자전적 소설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도시의 학살, 말하자면  광주민주화 운동을 그린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고, 새로운 꿈을 꾸고, 그것의 정체를 찾기로 마음먹게 되지만, 대의마저 집어삼킬 개인적인 작별의 아픔속에서 신음했던 것이다. 그녀는 실체가 있는 육체적 고통에 갇힐 때가 많다.

무딘 칼로 안구 안쪽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다.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129쪽)


경하는 제주도 활주로 아래에서 발굴된 유해들을 보게 되고, 인선의 가족들이 겪은 제주 4.3 사건을 자신이 담당해야할, 작업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것이 죽음앞에서 죽음을 넘는 길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선과 경하의 육체적 고통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죄로 감옥살이하면서 고문을 받았던 사람들의 고통으로 연결된다. 모든 묘사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지만, 그것들이 실처럼, 신경의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가 나중에 그런 말을 하기도 한다. 물의 순환을 그리면서 내가 맞는 이 눈이 학살당한 시체들이 맞은 눈일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지극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 말에 동의한다. 보잘것 없이 허깨비만 남은 엄마라고 생각하고, 새삶을 찾아 떠났던 인선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향에 돌아와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된다. 부모가 학살되고, 오빠의 생사가 불확실하며, 집이 불에 탄 엄마가 살아낸 삶의 궤적과, 그 문제를 입밖에도 내지못했던 세월을 견딘 그 힘으로부터, 문민정부에 들어서서 마침내 인선의 엄마는 유족으로서의 맹렬한 활동을 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결국 치매환자가 되지만, 그때서야 감춰두었던 진실들을 딸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인선은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아픔으로 껴안고, 친구와 혼들을 위로하는 나무심기를 하고자 했다.


경하 역시 자신을 유서를 집행할 어느 한사람을 찾지못해 죽음이 늦춰지는 시간, 인선과 이야기했던 일들이 결국은 자신이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깨닫는다. 인선의 가족들이 겪은 아픔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친구와의 진한 소통(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오래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되살림은 이 책의 주제가 되어있기도 하다. 치매에 걸려 딸을 언니로 동생으로, 낯선 사람으로 대하는 인선의 어머니는 때때로 딸을 쓰다듬는 엄마로 돌아오는데, 그 사랑을 느낀 인선이 이렇게 말한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311쪽)


이 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이 많았지만, 내가 모르는 새로운 단어들, 자주 쓰지 않는 단어지만, 꼭 필요한 단어도 많이 눈에 띄었다. 하나하나 그 단어의 의미를 되짚게 했다.


우듬지: 소설속에서 많이 나온다. 우듬지가 잘린 나무들을 심을 프로젝트를 생각한다. 묘비와도 같고, 사람 모양의 등신대와도 같은. 우듬지는 나무꼭대기의 줄기를 말한다.


필압:인선 어머니의 필적을 인용할 때 사용했다. 연필에 힘을 준 정도. 나중에는 힘이 없어져서 글은 커졌고, 필압은 흐려졌다고. 소설은 영화의 한장면처럼, 연필에 힘을 줘서 무언가를 적는 당찬 여인네와 힘이 없어지고 안구는 흐려져서 또 무언가를 적는 할머니를 그리고 있다.


1960년의 청색 볼펜 글씨와 같은 필적이지만 필압이 다소 줄었고 글씨가 두배 가까이 커져있다.(283쪽)


속솜허라: 인선의 아버지가 자신이 머물던 동굴에 갔을때 딸에게 했던 말, 숨을 죽이라는 말의 제주도 사투리란다. 뒤에 319쪽에 눈속에 누웠을 때 작가는 "솜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솜속을 바꾸어 말하니 속솜이 되었는데, 작가가 의도하여 사용한 단어가 아닌가 싶었다. 속솜할때, 솜속같을 수도.


해연: 해구 가운데, 깊이 들어간 부분을 뜻한다. 해구는 또 무엇인가, 바닷속에 있는 길고 좁은 도랑을 말한다. 바닷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긴띠같은 바닷길을 상상할뿐이다.


연니: 모든 해저 생물체들의 사체가 연니가 되어 떨어져내리는 거였다. (255쪽) 연니라는 단어는 처음 접했다. 연니는 바닷속 무른 흙을 이르는 말로 플랑크톤의 유해라고 사전에 나와있다.


제주도 사투리: 인선어머니의 증언과, 제주도 유족들의 증언등 꽤 많은 사투리가 나온다. 어미들이 짧은 소리, 자세히 읽지 않으면 그뜻을 잘 새길 수 없다. 책을 읽다가 다른 생각이 들면, 바로 길을 잃었다. 마음을 바로하고 정독의 마음을 유지해야 그 뜻이 이해되곤 했다. 이책의 많은 부분처럼 사투리도 긴장을 놓칠 수 없게 한다.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194쪽)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울었다. 아주 희미한 울음이었지만. 누군가는 혼으로 왔던 것같은.

이런 류의 직유법의 문장들이 많이 보였다. 살이 베일듯 날카로운 문장들도 많았다. 그런 것들이 이 작품을 잊지못하게 하고, 이 책의 내용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숙제를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것같다.


숨을 죽여야 들리는 작은 소리다. 물속에서 모래가 쓸리는 것같은, 누군가가 손끝으로 쌀알을 흐트러뜨리는 것 같은 소리가 미세히 커졌다 잦아든다.(252쪽)

차츰 음량이 낮아져 휘발하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속삭이다 말고 문득 잠든 사람의 얼굴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253쪽)

수틀에 당겨 끼운 천처럼 팽팽한 침묵을 느끼며, 그걸 바늘처럼 뚫는 내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인선에게 다가갔다.(303쪽)

커다란 공목천 가운데를 가윗날로 가르는 것처럼 엄마는 몸으로 바람을 가르면서 나아가고 있었어. (311쪽)

메스에 몸 가운데가 벌어진 것처럼. 피투성이 기억들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것처럼. 그 섬광이 지나가는 즉시 더한 혼란이 찾아왔어.(313쪽)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모래펄이 완전히 잠긴 뒤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314쪽)

수천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318쪽)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난 후 제주도는 더이상 같은 곳이 아닌 것만 같다.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광주를 더이상 평범한 도시로 볼수 없듯이 말이다. 제주 출신 친구가 생각나는 밤이다. 그녀에게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텐데, 나와 소원해진 그 친구도 이런 아픔속에 살았을까 싶다. 육지의 철모르는 아해들이 한심했으려나.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그때는 광주도, 제주도도 목소리를 숨겨야했다. 그랬기에 친구도 그 누구도 쉽사리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제주도에 가면 올레길을 걷고 4.3 평화공원을 가보리.


(마지막으로 이 책을 공급대란을 뚫고 한국에서 보내준 친구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고마워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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