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아이에게 바다를 보여준 날을 기억한다. 육아에 지친 어느 주말 여름,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즉흥적으로 군산 선유도를 찾았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라 당일치기로도 부담이 없는 거리였다.
바다에 도착해 살짝 발을 담가보니 생각보다 물이 차가웠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해수욕은 무리처럼 보였다. 수영복이며 튜브며 제대로 된 장비도 없었던 터라 이번엔 바닷물에 손이나 한번 대보는 것에서 만족해야지 싶었다.
여기가 책에서만 보던 그 바다라고 설명하자, 아이는 조심스레 바닷물에 손을 넣었다. 그렇게 몇 번 물을 튕기는가 싶더니 털썩 자리에 주저 않는 게 아닌가. 아뿔싸! 미처 잡을 세도 없었다. '그래, 바지 좀 젖으면 어때. 갈아입히면 되지.' 체념하고 있는데 아이가 일어나다가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놀란 남편은 물 먹은 아이를 허겁지겁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평소 같으면 자지러지게 울 판인데 아이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저 자신을 놓아 달라고 발버둥 칠 뿐이었다. 바다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어찌나 필사적이던지. 그 후로도 시도 때도 없이 바닷물과 모래가 아이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꺄르르륵 웃으며 처음 만나는 바다를 마음껏 즐겼다.
그렇게 아이가 자라는 동안 바다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지난여름 제주의 협재 해변에서는 1일 3 물놀이를 실천하며 엄마, 아빠의 체력과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했다. 모래놀이며 고둥 잡기며 놀 것이 천지인 곳. 아이에게 바다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나 역시 어릴 때 바다에서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에게 매달려 깊은 바다에 들어갔을 때의 짜릿함과 튜브 위를 둥둥 떠다닐 때의 자유함. 뙤약볕 아래 새카맣게 타다 못해 등껍질이 다 까져도 상관없었다. 시원한 수박과 뜨끈한 옥수수를 양식 삼아 하루종일 바다를 즐겼다. 물론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아찔한 기억도 난다. 그래도 바다는 언제나 그립고 가고 싶은 장소였다.
당신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인가요?
그림책 <해변과 바다>는 사람들에게 바다가 어떤 의미인지 잘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그림을 쪼개지 않고 양쪽의 펼침면 전체를 활용해 바다와 사람들의 모습을 시원하게 그려냈다. 그림책은 사람들이 썰물의 모래밭에서 노는 장면에서 시작해 점차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썰물과 밀물의 사이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다를 즐긴다. 해변에서 조개를 잡기도 하고, 파라솔 아래에서 책을 읽기도 한다.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보이고, 깊은 물에서 스노클링을 하는 이들도 보인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바라만 보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바다가 얕으면 얕은데로 깊으면 깊은 대로, 바다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 바다를 만끽한다.
▲ 표지 바다와 모래밭을 연상시키는 색감을 이용한 표지 ⓒ 그림책공작소
<해변과 바다>는 그림책의 물성을 잘 활용한 그림책이다. 가로 26.5cm, 세로 35cm이라는 제법 큰 판형을 택해 넓은 바다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또한 딱딱한 양장이 아니라, 말랑 말랑한 페이퍼백으로 되어 있어 손으로 책을 만지면서도 바다의 유연함을 느낄 수 있다.
▲ 썰물과 밀물 점차 바닷물이 차오르며 변하는 해변과 사람들의 모습 ⓒ 그림책공작소
이 그림책은 부모들이 호완마마보다(?) 무서워한다는 글 없는 그림책이기도 하다. 보통 부모들은 아이가 글 없는 그림책을 가져오면 읽어줄 게 없어, 혹은 어떻게 읽어줘야 할지 몰라 멘붕이 온다는데, 두려움을 거두시라. 안쪽의 그림은 물론이고, 물결치는 면지와 뒷 표지의 물고기 바코드 이미지까지. 글 없는 그림책 <해변과 바다>에는 읽을거리가 가득하다. 그래도 영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안 온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읽는지를 유심히 관찰해 보라. 유능한 그림책 독자인 아이들은 그림을 보며 각자가 창조한 세상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선수다.
▲ 펼침면을 가득 채운 그림책의 한 장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인다 ⓒ 그림책공작소
그림책 <해변과 바다>의 가장 큰 미덕은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 각자가 간직한 바다에서의 추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것이다. 스노클링 하면서 봤던 총천연색의 산호초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을 때 느꼈던 평안함. 이 책을 읽고 나면 바다가 보고 싶다. 바다에 가고 싶어 진다.
바다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핵오염수
지난 8월 24일 기어이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다. 중국과 홍콩은 즉각적으로 일본 수산물 수입 전면 금지를 발표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류 전부터 소금을 사재기했다. 어떤 이들은 김이나 미역 같이 오래 보관이 가능한 해조류를 미리 사두기도 했다. 하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해산물만 조심하면 될 일일까.
이제 더 이상 바다는 우리가 사랑하던 그곳이 아니다. 바다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핵오염수가 떠오른다. 무섭고, 두렵다. 어떤 이들에겐 지금 당장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우리 바다까지 오지 않았으니 시간이 더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머지않아 '바다 보러 가자'라고 말할 때의 해방감은 사라질 것이다. 먼바다를 바라볼 때도 걱정스러운 마음부터 들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은 앞으로 마음 놓고 바다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바다를 인간의 편에서만 바라보는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해변과 바다>의 마지막에는 매 장면 등장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깊은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떼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넓고 깊은 바다의 주인은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 그림책의 마지막 펼침면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떼는 말한다. 바다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 최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