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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잘레스 파파 May 12. 2022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

탁월했던 독재자

100불도 안 되는 1인당 GDP, 바닥난 외환보유고

"전쟁과 기아로 다 쓰러져가는 불타버린 집"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굶어가던 나라.

전국의 농토가 황폐화되고

전국의 산들이 민둥산이었던 시절,

바로 60년 전 한국이다.


분명, 독재를 옹호하고자 하는 글은 아니다.

오로지 먹고살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이뤄졌나

통치자가 가져야 할 위기의 리더십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그런 고민에서 시작된 기록이다.


역사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보면 볼수록 탁월한 리더와 운명 같은 기적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

그의 과거는 차치하고, 대통령으로 집권한 이후의

경제개발의 역사만 짧게 훑어보고자 기록한다.




이승만과 장면 내각은 실패했다.

미국의 원조가 없었으면 국민의 반 이상이

기아에 아사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던 나라였다.  

정부 주도의 경제부흥계획은 모두 실패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장면 내각부터 존재했지만  

3공화국 초기의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을 일으킬

말 그대로 "쩐"이 없었다. 정말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시작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은행을 국유화하고, 통화개혁을 단행하고,

내수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지만

인프라를 구축할 돈이 없으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외자를 유치할 달러를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진 게 없으니 몸으로라도 때워야 하겠지.

1902년 끔찍하게 가난했던 대한제국 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났던 최초의 강제 이민처럼.


그래서 1963년,

정부는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 보낸다.


노동력이 부족했던 서독은

당시 3,0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광부와 간호사 같은 힘든 노동을 부탁했다.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이다.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는 총 7,936명

서독으로 파견된 간호사는 총 10,226명이었다.


서독으로 파견근로를 갔던 간호사와 광부 (1963)


서독으로 파견된 근로자들이 송금한 돈은

당시 우리나라 연간 수출액의 2%에 가까웠다.


노동자들의 땀으로 일군 돈으로

겨우 경공업 육성을 위한 인프라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경제성장의 큰 동력이 된 

베트남 전쟁이 터진다.


아이러니하게,

패망한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경제를 일으켰듯,

한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경제를 일으켰다.

누구의 불행이 누구에겐 기회가 된다.


1964년, 월남 파병의 대가로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인프라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다.


사단급 전투부대까지 파병한 선물이

바로 응용과학기술의 원조가 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다.


월남전 파병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경제개발이 급했던 한국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을 듯.

게다가 삼백산업의 하나였던 면직물을 원조받던 나라가

메리야스를 만들어 수출해야 되는데

그걸 예외적으로 허용해준 게 한국이었다.


원조받은 재료로 가공품을 만들어

차익을 남긴다는 게 대외원조정책에

맞지 않았으니 말이다.


가발, 메리야스, 신발...

노동력으로 일군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은

구로공단의 수많은 여공들의 희생이 있기에 가능했다.


월남전과 구로공단 (1965)


남성들은 월남에서

여성들은 구로공단에서

부지런히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런데, 시대가 바뀐다.

이른바 닉슨의 데탕트 시대가 온 것!

월남 패전의 영향으로  

미국 경제도 추락할 대로 추락했고,

한국에게 허용됐던 메리야스 수출도 금지했다.

바로 "Textile 쿼터제"다.


경공업으로 먹고살던 나라가

수출길이 막히니 어떻게 먹고살라는 것인가?


그래도 열심히 일한 대가로  

벌어들인 달러가 있으니

박 대통령은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한다.


여기에 들어간 달러는

사실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의 대가가 컸다.

지난 식민 지배에 대한 어떠한 배상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조건부의 치욕스러운 협정이었지만,  

경제개발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1965년 우리는 일본에게서 청구권 3억 달러와

경제 차관 3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이 돈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넘어가는

개발 동력 자금이 된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먹고사는 5가지 산업들이다.

1970년 포스코 건설을 시초로 제철산업을 육성했고,

1972년 현대조선소를 시초로 조선사업을 육성했고,

석유화학, 기계, 전자산업에 자금을 투입했다.

조선과 반도체, 철강 강국이 된 계기였던 것이다.


중화학 공업 육성 (1970년대)


한창 외자가 많이 들어가는 중화학공업 육성 시기

전 세계적으로 큰 사건이 터진다.

바로 "오일쇼크"다.


1973년 중동전쟁을 시작으로 중동 국가들이

일제히 석유 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을 인상한다.

중화학공업에 필수적인 석유가 없으니 

거의 문 닫으라는 소리!

지금 같았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참 아찔하다.


정부는 타개책으로 중동에

태권도 교관을 보내고 최규하 총리를 특사로 보낸다.  

이런 노력으로 국내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하게 된 것.

그 유명한 "중동건설 붐"이다.


1975년부터 5년간 중동건설로 벌어들인 외자는

총 205억 달러, 당시 수출액의 40%에 달했다.


정말 몸 쓰는 일이라면 해외 어디든 보내는

대단한 민족이다. 이른바 몸빵으로 일궈낸 경제성장이랄까.




차차 5공 이후의 쇠락의 길을 정리하겠지만,

박정희가 일궈낸 산업화 리더십은  

세계가 인정한 최고 수준이었다.

물론, 무엇보다 근면성실이 몸에 밴 국민들의 피땀이

가장 큰 동력이었지만, 선장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에.


쌀이 부족해 원조받은 밀로 끼니를 해결하는 나라에

쌀 자급률 100% 달성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미국의 지원으로 과학기술개발이 없었으면

통일벼 개발은 불가능했다.

새마을 운동과 산림녹화 정책이 없었으면

전국의 농토가 황폐화되었을 것이다.


기적은 노력이 기반이 돼야 빛을 발한다.

1977년 쌀 자급률 100% 달성을,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를 이뤄냈다.


최초의 컬러방송 송출의 역사보다  

일찍 개발돼 수출했던 컬러 TV도

5공에 들어서야 시작된 건

컬러 TV가 만들어 낼 사치와 환락에 대한

우려였다는 것도 대단히

검소한 양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다 보니 역사를 깊이 있게 훑게 된다.

모든 역사는 다 인과관계가 있고 그 안에서

기적 같은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비록 민주주의는 후퇴했지만,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 없었다면

인권도 민주도 다 허상일 뿐이다.


박 대통령의 어록 중에서 인상 깊은 말을 소개하고  

긴 글을 끝마칠까 한다.


"인권, 민주 모두 다 좋은 말이오.

그러나 참다운 인권과 민주는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나옵니다.

당장 배고파 죽어가는 국민들 앞에서

말장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인권이나 민주는 경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두고 보시오.

모든 결실은 나보다 오래 사는 세대에게

돌아갈 겁니다"


기적 같은 산업화가 있었기에,

끔찍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했다.


역사는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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