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기만 했던 노을이 따뜻해졌다 (ft. 김화진 <나주에 대하여>)
채하. 빛이 아름다운 노을.
엄마는 사방이 금빛으로 물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자신에겐 하루 중 가장 위태로운 시간이라고 했다. 한때는 왜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굳이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지 의아했지만, 최근 엄마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쨍한 날보다 비 오는 날을 선호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모든 것을 꿰뚫고 비추는 태양 아래서 숨을 곳 없이 나의 전부가 전시되는 느낌이 늘 기이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흐리고 흘려보내야 할 것을 씻어 내리는 비가 더 좋았다. 더 인간적이었다.
김화진 작가의 단편집 <나주에 대하여> 중 마지막 작인 <침묵의 사자>에서는 붉은 갈기를 가지고 알 수 없는 열기를 내뿜는 사자가 등장한다. 늦은 오후의 강렬한 햇빛과 분간할 수 없는, 노을 같은 사자가. 입으로 소리 내지 않고 화자의 머릿속 울림으로 소통하는 침묵의 사자는 화자에게만 나타난다. 이야기 말기에 화자는 이 사자가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를 깨닫는데,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제야 사자가 왜 내게 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뜨거운 사자의 기운은 뭔가를 말리는 데 적격이었다.
내 마음은 약으로 조절하고 내 기억은 사자가 다가오는 뒷목 쪽에 널어두었다."
나중에 다시 제대로 된 서평을 쓰고 싶지만, <나주에 대하여>는 작가가 "못생긴 마음들"이라 칭하는 감정들을 여덟 편의 이야기에 거쳐 다룬다. 열등감, 질투심, 자기 연민과 흠모 같은 축축하고 찝찝한, 비 오는 날에 널은 빨래 같은 마음들. 그 끝에 등장하는 사자는 작품을 거치며 숨기고픈 내면을 직면하게 된 독자들에게 습한 마음을 말릴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닐까.
볕에 나를 말리는 것.
책을 마친 후 거실에 혼자 앉아 창 밖을 보았다. 빼곡히 쌓인 아파트 창문들이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해가 쬐고, 거실에 그림자가 생기고, 빛 속에 투명한 먼지가 둥실거린다. 빛줄기 끝에 마루에 무릎을 안고 앉아 있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온기를 느낀다. 노을에 삼켜지지 않으려, 굴복하지 않으려 버텨내는 것이 아닌 볕을 받아 하루에 누적된 피로를 말리는 시간.
"나는 말없이 사자의 몸이 점점 내 쪽으로 기우는 것, 커다랗고 따스하고 진한 빛이 창문을 넘어 점점 거실 안으로 깊숙이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줏대 없는지, 나는 창문을 너머 들어온 사자를 떠올리며 숨지 않고 그 빛을 온전히 받아냈다. 앞서 수록된 <정체기>에서 아름다움과 무서움의 차이는 너무나도 미세하댔지. 아무래도 그것이 맞나 보다.
"그런데 그 변화가, 아름다움과 무서움의 차이가 너무 미세해서 마음이 달라진 건지 여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체기>에서
채하. 빛이 아름다운 노을. 노을의 빛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것을 물들이는 광명 때문이 아닌 그 시간 동안에만 느낄 수 있는 나른한 온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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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과 11월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