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떠오르는 날

by 결아

산란한 마음으로 집에 있으면 하루를 날릴 것 같아 서둘러 노트북을 챙겼다. 민트색 니트를 입고 목도리를 둘러 밖으로 향했다. 찬 바람이 볼을 휘갈겨 목도리 속으로 숨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늘 가는 동네 카페에 도착해 두 시간을 앉아 오랜 숙원사업을 끝냈다. 중간에 진도가 더 이상 못 나갈 것 같아 포기하고 집에 갈까 했지만 계속 밀고 나가다 보니 어느새 끝이 났더라. 날아갈 것만 같다.


휴대폰에 엄마 문자가 도착한다. 밖에 눈이 오고 있단다.

창 밖을 보니 어느새 정말 눈이 오고 있다. 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조금 전 만해도 보일 듯 말듯하던 눈이 제법 굵어진 게 보인다. 문을 나선다.


눈꽃이다.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천천히 내리는 눈. 내린다고 하기보단 떠다닌다는 것이 더 정확할듯한, 그런 눈. 둥실 거리는 눈꽃 하나를 잡으려 손을 뻗지만 놓치고, 놓친 눈꽃은 바닥에 영화로이 착지한다. 바닥을 닿자마자 녹을 줄 알았던 눈꽃은 형태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

검정 아스팔트 위에 당당히 핀 하얀 꽃. 왠지 모르게 대견한 겨울의 홀씨.


가만히 서서 눈 구경을 하다가 갑자기 추위를 기억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빨간 신호등 앞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검정 롱패딩을 입고 서있다. 몸집만 한 검정 배낭에 퐁실한 노란색과 하늘색의 인형들을 달고 한 손에는 회색 시험지를 들고 있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내리는 눈을 보며 어린아이 같이 웃으며 재잘거린다. 그들이 무슨 걱정을 안고 살고 그 무게가 어떤지 나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저들은 기쁨 그 자체다. 몇 발치 뒤에 있는 나까지도 가슴이 간질거린다.

나도 그들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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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같은 이치로, 아무리 불행이 무수하게 이어져도 그 이후엔 그만큼의 기쁨으로 채워진다고 한다. 반대로 그 기쁨의 끝에는 불행이 기다린다는 말도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깊은 웅덩이와 높은 물결, 그 중간 어디쯤에 잔잔함의 순간이 있다면, 그 중립의 상태가 온전한 평화가 아닐까. 적당한 자연음이 섞인 그 고요가 진정한 행복 아닐까.


굳이 따지자면 오늘 아침은 불행이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곳이 있었고, 그 길을 따르다 보니 나는 작은 기쁨들을 마주했다. 그 끝에 정돈된 마음은 나를 단단하게 채운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그 무엇도 내게서 이 평온함을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하루가 저문다.

눈이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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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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