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일지 (1)

땅에 철저히 부딪혀야만 그 형태와 정체가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by 결아

늦가을이 이미 지나고 세상이 조금 더 잿빛이 된 초겨울. 지난 반년 간 몸 담은 일에 마지막을 끝내려 동네 책방으로 향했다. 걸어서 40분 정도의 거리지만 산책을 좋아하고 그 길이 올곧아 운동 삼아 늘 걸어서 갔던 길이었다. 바람이 거세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걸었다.


이 일에 마침표를 찍으면 이젠 긴 기다림의 시간이겠지.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은 나를 스스로 평가대로 올려 타인이 나의 장래에 대한 결정을 내려주길 기다리는 일. 그래도 불안할 겨를은 없을 것이다. 이 일을 서둘러 끝내야 기다리고 있는 다른 무수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기에. 하지만 그것들을 처리해 가족들의 사소한 불편을 해소한다고 그들의 실망을 걷을 수 있을까?


계속 걸었다. 생각의 바퀴가 더 거세게 굴러갈수록 걸음이 그에 맞춰 빨라지고 양볼이 뜨거워졌다.

얼른 책방에 도착했으면. 어서 종착지에 다다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목적지에 가까워졌다고 알려주는 언덕을 조심히 오르려 목도리에 파묻었던 목을 빼 시야를 나의 걸음으로 낮췄다. 내가 딛어야 할 땅을 보다 잿빛 아스팔트 위에 하얀 알갱이들이 부딪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주변도 둘러봤지만 도무지 하늘에서 무엇이 내리는 것 같지 않았다. 오직 다시 아래를 봐야만 땅에 떨어져 튕겨 오르는, 희고 단단한 형체가 또렷한 우박이 보였다.


그 순간 생각했다.

아-. 땅에 떨어져야만 그 형태가 드러나는 것들이 있구나. 철저히 바닥에 부딪혀야만 정체가 드러나는 것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떨어지는 우박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24의 환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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