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e Oct 05. 2022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나는 가지 못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출근하기 30분 전에 일어나서 빵조각 몇 개를 주워 먹으며 카톡에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상. 잘 넘어가지도 않는 토스트를 억지로 입에 구겨 넣으며 가족 카톡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할머니가 오늘 새벽 04:51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곁으로 가셨어요..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놀랄 소식이었다. 작년부터 몸이 부쩍 안 좋아지신 할머니의 소천은 예상한 것이었으나, 일러도 너무 일렀다. 당장 부모님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부모님의 목소리는 비교적 차분했다. 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서 부모님께 연락드렸다고 해도 이미 한국은 오후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내신 것 같았다. 새벽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에 필요한 모든 수속은 모두 다 끝마쳤고, 나와 통화할 때는 비워지는 빈소의 순서를 기다리고 계셨다.


오늘 당장 비행기를 타고 가겠다는 내 말에 부모님은 만류했다.

"네가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오랜 해외생활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꼽는 것 중 하나이다. 가족들의 경조사를 처음부터 함께 하지 못하는 것. 가족들과 교류가 없거나 사이가 소원하면 이보다 더 좋은 장점일 수 없으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그저 살았다. 하지만 한 해가 지나고, 다섯 손가락을 넘는 시간을 해외에서 지내면서 조금씩 그 생각들이 바뀌고 있다.


부모님과의 연락을 끊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비행기 편을 알아봤다. 지금 당장 그날 뜨는 비행기 편을 타고 한국에 간다고 해도 다음 날 오후 4시 도착이다. 토요일이 발인이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금요일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셈이다.


비행기 편을 확인하자마자 부모님께 다시 카톡 했다. 부모님은 다시금 나의 비행을 만류했다. 이유는 내 임신 때문이었다. 아직 안정기에 들지 않은 몸이니 오지 말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바로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말이 맞았다. 나 또한 안정되지 않은 몸으로 2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은 무척이나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한국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후에 장례를 마친 부모님과 동생의 말을 들으니, 내가 가지 않은 것이 가족들에게 더 좋은 일이었다. 짧은 3일장이지만 가족들이 잠을 잘 수 있던 시간은 손에 꼽았다. 아직 임신 초기인 내가 그곳에 갔더라면 가뜩이나 신경 쓸 것이 많은 가족들의 마음에 더 부담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만약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회사고 뭐고 할머니의 부고를 듣자마자 당일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빨리 간다고 하더라도 장례의 중간에 도착할 뿐,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아쉬운 단계를 넘어서서 걱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어떨까. 나야, 내 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있으니 걱정을 한시름 덜겠지만 남편은 외동이다. 나와 남편 모두 직장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국에 들어가기도 참 난감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당장은 아닐지언정, 언젠가, 향후 몇십 년 안에는 반드시 마주할 미래가 분명한데 우리에게는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 부모님 곁에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곳에서 꾸렸던 모든 일을 다 접고 한국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이가 든 우리를 한국사회에서 받아줄까?


뾰족한 방법 없이 시간은 흐른다.



작가의 이전글 해외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딜레마, 인종차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