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나와 같은 대학, 같은 과의 5년 선배이다. 내가 대학 신입생일 때 남편과 남편의 절친 한 명이 나와 내 친구들을 모아 공부를 하자며 스터디를 꾸렸다. 후배들 앞에서 똥폼을 잡던 선배지만 막상 같이 공부했던 과목 학점이 우리보다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남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졌다. 하지만 남편은 글을 잘 썼고, 유머감각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나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결혼을 했고, 20년째 잘 살고 있다.
남편이 ‘전생 이순신 장군의 부하’가 된 것은 내가 회사를 싱가포르 지사로 옮기고 온 가족이 싱가포르로 함께 오면서부터였다. 남편이 싱가포르에서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회사 가서 돈을 벌어오고, 남편은 살림을 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남편도 마침 휴식이 필요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편은 집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자유를 만끽했고 스스로 전생에 이순신 장군 부하였고 워낙 공을 많이 쌓아서 본인이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코로나가 터졌고, 싱가포르는 그 당시 한국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통제 정책을 펼치고 있었기에 나와 아들은 회사와 학교를 가는 대신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남편의 밥 수발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청소를 해 주던 파트타임 헬퍼도 더 이상 집에 부를 수 없었고 외식도 못했다. 몇 개월을 그렇게 보내다 어느 날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던 남편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으니 헬퍼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당시에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헬퍼가 싱가포르로 오기 힘든 상황이었고, 외국인에다 어린아이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헬퍼를 고용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나 헬퍼 수급이 어느 정도 정상화되자마자 나는 전에 싱가포르에 살았던 친구의 추천으로 좋은 헬퍼를 고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남편의 주부 생활은 끝이 났다. 그리고 남편은 전생에 이순신 장군의 여느 부하가 아닌 오른팔로 등극하게 되었다. 남편은 진정한 백수 생활을 누리기 시작했으며, 코로나 시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매달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으로 여행을 다녔다.
사람들이 남편은 무슨 일을 하냐고 할 때마다 그냥 나 따라와서 여행이나 다니면서 논다고, 참 팔자 좋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생활을 5년이나 별 갈등 없이 지속할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남편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즐겼으며, 나에게 고마워했다. 너무 고마워해서 ‘그래, 당신이 이렇게 행복하다면 내 한 몸 희생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하루종일 영어로 일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벅찬 상황이었고 일 외의 다른 모든 것, 예를 들어 아들 학교 및 과외 선생님 연락, 장보기, 월세 송금, 의료비 청구, 세금 및 회계 관리, 헬퍼에게 한국 요리 가르치기, 헬퍼가 일하지 않는 일요일이나 공휴일 요리 및 설거지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남편에게 다 일임했으며 남편은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남편은 젊은 시절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그때는 어린 아들을 혼자 돌보느라 너무 힘들었고, 남편에게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일을 줄이라고 자주 싸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성실함과 헌신이 고맙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흰머리를 염색하고 있는데 (아마도 회사에서 고생을 해서), 다섯 살이나 많은 남편은 아직도 흰머리가 없다 (아마도 회사에서 고생을 안 해서).
내가 회사를 그만두니 남편이 자기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며 한국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그 없이 나는 아들과 단 둘이 싱가포르에서 살 수 있을까. 결국 남편이 나를 의지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의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