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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Jun 19. 2022

나비잡이

 곤충을 잡을 땐 침착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게 곤충 출몰했을 때 소리 지르며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은 침착함이 부족하다. 사람이 모인 공간에 낯선 벌레가 나타나면 몇은 정신을 잃고 그들과 다르게 이런 부분에만 용감한 한시적 용사들이 나서 창과 방패로 적을 섬멸한다. 그중에 조금 무른 심성을 가진 이들은 조심스럽게 벌레를 잡아 먼 곳에  놓아준다. 사람들의 행동은 죄다 미지의 것을 경계하는 본성에 충실한 반응이다. 마침내 공간 안에 벌레가 없다는 안도로 빠르게 일상을 되찾고 평화는 찾아온다. 그들이 불청객이었던 것일까?


나도 예전엔 용사를 자처했다. 아니 인간을 위해 맞서는 용사라기보다 곤충에 열광하는 학자였다. 굳이 편을 고르자면 난 곤충의 편을 들 것이다. 그땐 곤충을 만지는 것이 당연했고 그들을 잡고 관찰하고 다시 놓아주며 그들에 대해 보고 배워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곤충을 만지기가 두려웠다. 언제부터일까 숲에 가지 않을 때부터인가? 공원에도 가지 않을 때부터인가? 도시 갇힐 때부터일까?


소리 없이 다가가 페트리 디쉬의 뚜껑을 이용해 바닥에 앉은 나비 위를 덮는다. 그리고 잠시 채집통을 꺼낼 동안 그대로 놔두었다. 나비는 페트리 디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자유의 활공을 위한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나비의 의지와는 다르게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끝까지 올리지 못하고 투명한 벽에 눌려 화려한 무늬를 찍어냈다.  땅바닥과 페트리 디쉬를 번갈아 찍어가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나비의 모습은 부자연스러움을 넘어 흥미로웠다.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연타한 것처럼 절도 있고  수 백장의 필름 애니메이션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의 날갯짓이 하나의 단계 단계의 세밀한 과정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 보이는 선명한 무늬가 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나방이 날개를 쫙 펼쳐 천적을 쫓아내듯이 나비의 움직임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나비는 한 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하늘을 날만큼의 적절한 힘을 이용해 흰 배경에 점박이를 내 뇌리에 찍어 넣었다. 나는 채집통을 도로 넣고 살며시 페트리 디쉬를 들어 나비를 놓아준다. 나는 지금 나비에게 멸시자도 용사도 아닌 납치자다. 다시 날아가는 나비를 보고 있자니 방금 전 그의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절망 속의 흥분 그리고 간절함. 탈출을 위한 나비의 날갯짓은 발작에 가까웠다. 날갯짓뿐이었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어쩌면 그 소리 없는 날갯짓에 영감을 받은 내가 나비를 일찍 풀어주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오랜만에 곤충을 잡아보겠다는 내 생각은 참 보잘것없었다.


곤충은 짧은 생애를 지닌다. 짧은 생애만큼이나 열렬한 생을 살고 간다. 우리는 매해 태어나고 빛나고 죽어가는 수많은 벌레들과 공존한다. 그들의 찬란한 희로애락과 애달픈 영고성쇠가 우리들에게 들리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더라도 결국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한다. 무엇이 짧다고 말할 수 있겠나? 적어도 그들은 언제나 활기차고 번쩍이는 모습을 하고 죽는 순간까지 생을 허투루 소비한 적이 없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어린 시절 나는 무언가 광적이었고, 그 시절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곤충과 공룡이었다. 너무나 달라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은 큰 공통점을 가진다. 미지의 생명체, 인간의 손을 아득히 벗어나 과거와 현재 사이사이 이 세상 널리 분포하는, 하지만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마이너다. 인간의 삶에 있어 파리의 생애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이며 당장에 앞둔 시험에 비해 벌들의 죽음이 뒷전인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세상사에 오염되지 않은 온실 속의 나는 창밖으로 활보하는 정장과 구두의 사람들 그 너머 그 이상의 미지, 그것에 신비함을 느꼈다. 마이크로의 세계이자 지구 상 가장 다수의 사회. 야수도 맹수도 전멸해버린 섬뜩한 숲의 정적 속에 꼭꼭 숨어 대를 이어나가는 그들은 작은 몸으로 가장 인간의 관심을 아득히 벗어나 지금까지 생존해왔다. 어렸던 나는 몸집이라는 우월적 조건을 이용해 곤충을 사로잡아 기르고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 연구비나 이달 식비 따위의 걱정은 접어두고 오로지 탐구에 희열을 만끽했다. 어쩌면 나의 다른 생의 시발점이 되었을 수도 있는 그 재능과 의지를 더 눈여겨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갈고닦고 다른 차원으로 증폭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난 그러지 않았고 유년의 행복한 추억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유년이라는 환상의 경계를 벗어나기 위해선 행복을 덜어내고 끈기를 길러야 한다. 무슨 일이든 손을 놓는 순간 페트리 디쉬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 버린다. 그 순간 남는 것은 나의 열렬하고 짧았던, 이제는 추억이라고 밖엔 부를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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