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파묻기 위해 판 구덩이. 그 속에 산 채로 매장되어 방역을 위해 희생되는 돼지들. 이 불온하고 께름칙한 업무에 연관된 사람들 누구 하나 자신이 포함된 상황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돼지를 묻을 구덩이를 파는 포클레인 임부. 구덩이에 비닐을 깔고 작업을 위해 환경을 조성하는 임원. 축사에서 구덩이까지 돼지를 밀어 넣는 몰이꾼. 이 모든 상황을 뒤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농장주. 그리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농장 주인의 반푼이 아들. 모두가 하기 싫고 짜증이 나고 참담하지만 구제역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막아내기 위해 꼭 거쳐야 할 일이었다.
주인공 남자는 구덩이를 파게 된 포클레인 임부 중 한 명이다. 그는 묵묵히 땅을 파면서 자꾸만 걸려오는 아들의 전화에 자신의 과거사를 회상하게 된다. 통화 내용은 아들의 일방적인 다그침. 아들은 그가 부인과 이혼을 하길 바랬다. 땅을 파는 일. 수십 년을 손에 절여온 포클레인 조작법은 이제 두 손으로 땅을 파헤치는 것만큼의 단순한 움직임이 되었다. 단순 노동을 할 때면 다른 잡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동의 움직임처럼 강하게 뇌리에 박힌 생각 또한 끊김 없이 반복 재생될 수 있다. 아들의 전화를 받은 그의 머릿속에는 일하는 내내 자신이 과거에 범했던 과오와 그것에 분개해하는 아들의 모습, 후회와 미안함이 뒤섞여 강한 악순환의 굴레를 만들어냈다. 그는 과거, 바람이 나서 아내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했었다. 그리고 가정에 소홀했고 자신의 어긋남을 알아차렸을 때 집을 나와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자신의 비참한 인생의 쓴맛을 곱씹고 있던 그는 나중에서야 세 사람의 불륜 영화가 진행될 동안 그 한 켠 응달진 곳에서 아들이 이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계속 구덩이를 팠다. 무수한 돼지들이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깊이 팠다. 그리고 잠시 작업을 쉬는 도중 그는 구덩이 가에서 담배를 피우다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만다. 당황하여 서둘러 다시 나와 작업을 속행하려 했을 때 그는 그제야 자신이 구덩이 안에 갇혔음을 깨닫는다. 벽을 타고 오르려 해도 발이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고 점점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의 싹이 텄다.
나는 자꾸만 그가 파는 구덩이가 자기 자신을 묻게 될 구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혼. 아들과의 불화. 집도 일거리도 없던 밑바닥 생활. 모두 그가 판 구덩이, 구덩이.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파놓은 구덩이였다.
스스로의 과오를 과오라고 깨달았을 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 싶다면 타인의 입장에서 비로소 자신이 해를 끼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모순적이다. 타인에게 있어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나면 더 이상 과거는 입고 벗는 옷가지가 아니라 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표딱지임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