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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l 12. 2024

친절한 타인

단지 쿠키 한 상자일 뿐 _ 마시멜로 이야기 II


쿠키를 굽는 걸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친구 K는 나 말고도 배달할 곳이 더 있다며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우리 집 앞에서 쿠키 상자를 건네주고는 부릉 떠났다. 쿠키 굽는 시간은 그야말로 힐링타임이지만 그 쿠키를 혼자 다 먹으면 살이 찔 테고, 살이 찌면 스트레스의 종류가 하나 더 늘어나니까 진정한 우정이라면 그런 친구의 비극을 방관해선 안되므로 자신이 만든 쿠키는 철저하게 노동력의 분담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쿠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친구들은 먹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가 딱히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분명 내 추측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까, 잠깐 들어와서 만들어 온 쿠키 먹으며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해도, 마치 큰일 날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버무리며 지 할 말만 하고 다음 집을 향해 달아나는 것일 테지.


그녀의 쿠키는, 평소에 꽤 부단한 노력으로 절제하던 단거(danger)의 복병이다. 그래서, 공들인 탑 무너뜨리는 데는 가히 비밀결사대 수준이라고 투덜대는 것으로 내 몸에게 예의를 차려보지만 쿠키처럼 달콤하고 포슬포슬해지는 표정을 숨기는 데는 늘 실패한다. 누가 홈메이드 쿠키를 마다하랴! 게다가 친구의 쿠키는 아주 맛있다.


아껴가며 조금씩 먹겠다는 굳은 의지로 첫 쿠키를 고르지만 이내 마음과 손의 협응은 엉성해진다. 각각 다른 거니까 골고루 맛은 봐야 한다는 핑계로 조금씩 잘라먹다 보면 어느새 또 커피를 내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번에도 망했다.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한 여자가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책과 쿠키 한 상자를 사서 공항 라운지에 앉았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아둔 쿠키를 먹으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도 그 쿠키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자는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남의 쿠키를 먹고 있는 남자의 뻔뻔스러움에 화가 났지만 소란을 피워서 이목을 끄는 게 싫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상자에는 단 하나의 쿠키만 남았다. 그런데 남자는 마지막 남은 쿠키마저 집더니 반으로 쪼개서 여자에게 나눠주고는 빙긋 웃으면서 멋진 하루를 보내라는 인사까지 남기고 비행기를 타러 간다. 여자는 너무 기가 막혀서 그 남자를 쫓아가서 따지려고 했지만 마침 자신이 타야 하는 비행기의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와서 단념하고 책과 기내용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러다 가방 안에서 쿠키 상자를 발견한다. 아까 먹은 것과 똑같은, 아직 뜯지도 않은 쿠키 상자가 얌전하게 들어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웃음 끝이 사라지기도 전에 생각이 많아진다. 오래전에 읽기도 했고 그리 인상적인 책이 아니었는지 자세한 내용은 거의 다 잊었지만 몇 개의 이야기는 아직도 가끔 떠오르는 데 지금처럼 맛있는 쿠키를 먹을 때나, 누군가의 사소한 오해로 비롯된 에피소드를 들을 때다.


만약 내가 저 남자였다면 아무 말 없이 저렇게 멋진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닐 것 같다. 아마 첫 쿠키는 봐주겠지만 두 번째 부터는 어떤 행동으로든 이 쿠키는 당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쿠키 한 상자를 모르는 사람과 나눠먹는 것이 물질적으로 큰 손해도 아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일도 아니지만 그녀의 실수라는 생각에 앞서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 어쩌면, 하나 더 드릴까요?라는 마음에도 없는 호의를 베풀며 쿠키가 누구 소유인지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거나 짐짓 신경 쓰지 않은 척하면서도 이젠 그만 먹겠다는 듯 쿠키상자를 닫아 가방 속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이처럼 '단지 쿠키 한 상자'처럼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 삶의 소중한 걸 빼앗기거나 큰 타격을 입을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한 일이 왜 없었겠는가. 충분한 역지사지와 배려를 거치지 못한 판단은 오해가 되고, 마땅히 그랬어야 할 너그러움은 타이밍을 놓치면 후회가 된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한 가지 행동에 왜 저러지?라는 비난보다는 저러는 이유가 뭘까?를 먼저 짚어보는 친절한 타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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