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대학교 동기들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덧 15년이 넘었다. 그 사이 몇몇은 결혼을 했고,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묵묵히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1년에 한 번 얼굴을 마주하기도 쉽지 않은 사이가 되었지만, 막상 만나면 언제나 마음이 편하다. 그런 사람들과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인연에 대한 감사함을 무한히 느끼게 해 준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과거엔 무언가를 ‘이뤄내야’ 한다고 믿었다. 에디슨이나 베토벤 같은 위인이 되는 것을 한 번쯤은 꿈꿨고,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에 살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의 경로를 완성하는 것이 곧 삶의 의미라 여겼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예상치 못한 풍파들을 하나둘 겪으며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길러낸 부모들이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 없었고, 매일 같은 시간 사우나에서 신문을 펼치는 할아버지는 더욱 대단한 사람이었다. 모두 본인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방식으로 인생을 증명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삶의 의미는 이름을 남기거나, 많은 부를 이루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 사는가’에 대한 물음은, 역설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란 답으로 이어졌다. 삶은 본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간헐적으로 피어나는 행복과 사랑으로 삶을 살아낸다. 삶을 고통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인간은 ‘태어나졌기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예고 없이 고난과 역경의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 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비교와 판단이 가능하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마주한 고통은 언제나 주관적이고, 절대적이다. 누군가에겐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각자의 고통은 각자의 언어로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비관적으로 보이는 삶에도, 버틸 수 있는 내면의 전략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맞다면, 누구도 완전한 계획 속에 태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안전한 설계 안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안쓰럽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불특정 인간의 날카로운 말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사실은 자기 삶을 버텨내기 위한 방식일지 모른다.
아기의 검사 시간이 길어지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보호자 엄마는 본인 새끼의 안위를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진단서의 질병 코드 수정을 요구하며 퇴원을 거부하던 할아버지는 자식들의 병원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수술을 하면서 한없이 실수하고 혼나는 나조차 나의 업인 수술을 나름의 방식으로 배우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모두들 본인의 삶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결국 ‘왜 사는가’라는 물음은, 삶의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공동의 숙명’에 대한 인정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모두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졌고, 각자의 자리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존재들이다. 삶의 의미는 위대한 성취나 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서로의 고난을 버텨내는 모습에서 연민과 연대를 발견하는 데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그들의 최선을 인지할 때, 세상을 바라보는 비관적인 시선은 잠시나마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