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람 Aug 10. 2021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소설 인간실격을 읽고

 소설 「인간 실격」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요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다름에 대해 불안해한다. 그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추측하여 그 모습에 맞게 연기한다. ‘익살’이라는 가면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상대와 다르지 않음을 어필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체성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요조의 마지막 무대는 정신병동이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인생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자각하며 요조는 스스로에게 인간실격이라고 규명한다.     


요조는 살면서 2명의 친구와 관계를 맺는다. 중학교 친구 다케이치와 대학교 선배 호리키가 그들이다. 다케이치와 친구가 된 계기는 흥미롭다. 여느 때처럼 익살로 친구들을 웃기는 데 성공한 요조에게 다케이치가 다가와 ‘일부로 그랬지?’라는 말을 하게 된다. 자신의 본모습을 알아차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요조는 다케이치를 가까이한다. 집에 초대하고, 자신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 말을 흘려듣지 않고 ‘예언’과도 같은 말이라며 평생을 기억한다. 요조는 ‘마지못해’ 다케이치에게 접근한 것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익살연기를 알아봐준 다케이치에게, 어쩌면 자신의 본모습까지 알아봐줄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닐까? 평생을 거짓으로 살아온 자신에게 믿을 수 있는 진실된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마지못해’ 친구가 되었다는 요조의 말을 통해 좋아하는 관계에 대한 선택조차 피동적이라 인식하는 요조가 애석하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부끄럼 많은 생애’란 주체성이 결여된 삶이다. 늙은 순경이 쓰네코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할 때 요조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의 흥을 돋울 만큼 진술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하나 도움 되지 않는 공연’을 한 것이다. 그 밖에도 ‘서비스’, ‘봉사’라는 표현을 할 만큼 요조는 자신보다 익살이, 타인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여러 여성과의 복잡한 관계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모와 유머에 의도치 않게 여자들이 먼저 접근했다는 식이다.     


요조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발현하지 못한 것 같다. 자기존중과 자기확신이 없으니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허상의 기준으로 자기 검열하는 것이다. 그 잣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불안해하고 자기혐오를 하게 되며 더 나은 가면으로 삶을 재정비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자기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도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시스코와 그녀의 딸이 행복한 대화를 나눈 것을 목격한 요조는 자신이 사라져야 모녀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행복을 두려워하고 현실 직시를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애 부재의 명확한 방증이다.     


글을 읽으며 「자유론」의 존 스튜어트 밀이 떠올랐다. 그 또한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이 남들과 다름을 인지하고 이 때문에 스무살 무렵에는 신경쇠약을 겪는 등 혼란을 경험한다. 아버지의 엄격한 양육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배우지 못하고 갇힌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밀은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이 배운 것은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경험을 통한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이후 비판없이 받아들였던 아버지 친구인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에서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한다. 밀이야말로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자아를 실현한 것이다. 자아실현, 자기 모습 그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돕는 것 말이다.


요조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선호를 가지는 것이 타인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한 듯하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중 우선 하는 관계, 좋아하는 관계, 미루는 관계, 불편한 관계 등 여러 관계를 경험하고, 그중 가까이 하고싶은 관계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요조는 모두에게 동일한 선호를 가지는 것이, 동일한 ‘서비스’를 하는 것이 자신이 속죄할 수 있는 길이라 믿은 것 같다. 유복한 가정환경에 태어나 행운아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그에게, 자신을 버리고 미루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그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 믿은 것 같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죄의식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벌한 것이 아닐까. 요조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이 유의어가 아니라 반의어로 병기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자이 오사무, 요조는 자아를 포기하며 말 그대로 ‘인간실격’의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를 이해하고 싶은 것은 우리 또한 그와 닮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워 나의 모습을 감추고, 그만두고 싶은 관계를 놓지 못한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화를 내야 할 때 그저 방관하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실격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를 미루고 나의 소리를 저버리다 보면 내 인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요조의 말처럼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내가 인정하는 삶이 세상이 인정하는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태어난 인생, 인간실격으로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첫 째, 규명하지 않는다. 요조가 진정 인간 실격이 된 때는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 규명지은 때부터이다. 실격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자신을 규명지어서가 아니다. 합격이든 실격이든, 우리는 우리 모습을 관찰할 때, 명사의 오류에 빠지면 안 된다. 다만, 구분해야 한다. 자신, 신체, 사랑, 정신, 집, 커리어, 돈, 시간, 가족, 친구, 취미, 공동체 기여 등 나의 삶 전반에 걸친 영역들을 구분해서 관찰해야 한다.


둘 째, 분리한다. 나의 생각과 ‘세상’의 생각을 분리해야 한다. 나의 생각 또한 의심해보아야 한다. 누군가로부터 일시적인 영향을 받은 가짜 생각은 아닌지, 세상의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한다. 반대로 세상의 소리가 나의 소리는 아닌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내 삶의 어떤 영역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시선 때문이라면, 호리키처럼 나의 시선을 세상에 투영시킨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마주해야 한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나의 인간관계와 그간 애써 외면해왔던 일들을 들쑤셔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작고 약한 존재이므로 본능적으로 마주함을 회피한다. 술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깊은 집중이나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에 취하려 한다. 그것은 우리의 용기를 죽이고, 끝내는 잊고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마음 한켠의 느낌까지는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의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을 바탕으로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