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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모국경 May 06. 2023

글은 글이 되기 이전에 길이었다.

후배가 물었다.

"선배님은 왜 글을 쓰세요?"

불과 한 두 달 전에 받은 질문 같은데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시점에 내 머리 맨 앞에 떠오른 생각 하나를 가져다 대답한 모양이다.

나 스스로가 글 쓰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책 읽는 이유는 명확하다.




책 읽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오면

'나에게 책은 위로다'.라는 대답이. 굳이 생각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도 자동화되어 나오는 문장이다.

책 읽는 이유 역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에게 책이 '위로'라는 걸 잊거나 다른 것을 앞 순위에 두지는 않는다.

위로에서 -> 반성(성찰)으로 -> 배움을 지나 -> 의사결정력 도구로  책의 쓰임새가 순간순간 변동은 해도

기본적으로는 '위로'였다.


'위로' 떠올리기만 해도 울컥하는 단어다. (스스로 연민 말고 갱년기라 퉁치고 벗어나자)

당시 절실했던. 너무나 절실히 필요로 했던 그 '위로'가

활자라고는 만화책조차 보지 않았던 날 '책 읽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했다.

물론 책을 읽는 사람이라 해서 남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전이라던가, 인문학, 역사서, 과학서적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책을 읽기에는 나의 문해력은 그곳에 미치지 못한다.  

내가 읽은 책은 그야말로 나를 위로한 책이었다.

나 보다 못한 삶 속에서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 소위 자기 계발서라는 책들이었다.

내 머릿속에 통째 집어넣고 싶은 책,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오늘까지만 열심히 살아보고 안되면 내일 죽으면 되지' 하는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내 맘 속에 품은 채

'죽음'이라는 걸 '보험'으로 두고 산다고 나 자신의 삶을 표현했지만

살고 싶었고 그것도 누구보다 더 잘 살고 싶었기에 그런 책들에 손을 대지 않았나 한다.


대중목욕탕에 앉아서도 난 책을 본다.

여러 사람들이 입욕하는 장소에서 책을 본다.

'창피하지 않냐고?'

창피하다. 10년이 더 지난 습관이지만 지금까지도 눈치도 보인다.

내가 새벽 목욕을 즐기는 이유도 그나마 눈치 볼 사람들이 적어서 일 것이다.

그래도 그때 잠시 잠깐 보는 한 줄의 글이 주는 깨우침에 중독되어 이 버릇을 버릴 수가 없다.


대충 이쯤에서 책 읽는 이유를 마무리하고 다시 원래 질문이었던 글 쓰는 이유로 돌아가보자




글 쓰는 이유

'너무 많은 것은 없는 것과 같다.' 했던가

글을 쓰게 된 이유가 한두 가지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때 들어찬 감정으로 대답을 해 주었기 때문에

매번 대답은 순간의 억지로 짜낸 듯 기억조차 없다.

읽기처럼 '딱 이거다'하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자꾸만.

일상이 글의 소재로 들어온다.

어젯밤엔 이불 깔고 누워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처음 보는 건 아니고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영화다.

하지만 유명한 영화임에도 기억이 별로 없어 다시 봐야겠다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 달까지만 볼 수 있다는 자극적 광고문구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들게 했다.

그렇게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 눈을 뜨니 그 영화가 다시 나의 글 소재가 되어 머릿속에서 이미 쓰고 있었다


이렇게 어느 순간 글쓰기는

보이는 예쁜 풍경들을 내 것인 양 잡아 가두는 사진 찍기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잡아 가두듯 글로 저장하고 싶어졌다.


게다가 글은 말과 달라서 '자유'가 있어 좋다.

말은 들어주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지루해하지는 않을지 내가 쓸모없는 말들로 상대방의 시간을 소모시켜 버린 건 아닌지

걱정도 하게 되지만 글은 쓰는 나뿐 아니라 읽는 쪽도 자유롭다.

그래서 읽어 줄 상대의 수고스러움을 걱정하지 않고 맘 편히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좋다.

그렇다고 아예 안 읽어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브런치를 이용하지 않고 내 일기장을 이용했을 것이니 말이다.




막연히 쓰고 싶어 졌다가 글쓰기 이유가 되고 나니 이번엔 그래도 좀 잘 쓰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

글 잘 쓰는 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내 손에 딱 잡히는 글 잘 쓰는 법을 모르겠다는 거다.

그래서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판매 부수가 많은 책을 기준으로 잡아봤다.


코로나 이후부턴가 부자 되는 자기 계발서가 자주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세이노의 가르침>이나 <역행자> 책들 모두 한 푼 없는 상황에서 백만장자를 넘어 천만장자가 된 이야기이자 노하우에 관한 이야기다.

이들 책은 '현대판 위인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위인은 어쩌면 도덕적 부자가 아니겠는가

이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이겨내고 경제적 자유를 이룬 사람들이다.

판매부수가 어마 어마하고 다들 존경까지는 아니어도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가르침'을 받고자 책을 사서 읽거나 블로그나 유튜브를 보면서 그들의 인생을 배우려 든다.


이 책들에게 우리가 끌리는 이유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증명해 준 현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존재다.

현실에서 보았다는 것은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연결된다.

가난한 사람이 '백만장자 되기. 천만장자 되기. 억만장자 되기'를 아무리 멋지게 써 봐야 가난한 자의 책은 결코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잘 쓴 글은 몰라도 인기 있는 글은

쓴 사람들이 '잘 산 사람들이었다'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강원국 작가도 말했다

글을 잘 쓰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이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본다.

문 : 잘 살아서 글을 쓰고 있는가?

답 : 아니다.

문 : 그럼 왜 써?

답 : 내가 쓰는 글은 타인에게 깨우침을 주고자 하는 이야기 즉 읽어주기를 바라서 쓰는 글이 아니다.

      나를 다잡는 글이다.

      혼자 다잡는 게 힘들어,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나를 다잡고자 나의 일상, 나의 마음,          나의 생각을 드러낸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어느 시점에는 잘 살아서 읽어주는 글,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 나를 만들어 가는 글을 쓰는 중이다.



나의 글쓰기는 글이 되기 이전에 나를 만들어 가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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