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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의미 Feb 25. 2024

A4용지는 완벽한 종이

쓰는 도구만큼이나 집착하게 되는

얼마 전에 A4용지를 2,500매 주문했다. 한국제지에서 만드는 '밀크'라는 제품인데 만년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애용하고 있는 종이다. 가격은 500매 5개 구성으로 22,000원 정도 했다. 500매에 4,400원인 셈인데 대량이라서 조금 저렴한 편이다.


베이지('미색'이라고도 한다) 색상이 있었다. 일반적인 A4용지보다 약간 노란색을 띠고 있어서(오래된 소설책의 속지와 비슷한 느낌이다) 반사가 적고 눈에 부담이 적다고 한다. 요즘 책들은 속지가 너무 하얗고 글자가 쨍하게 인쇄돼 있어서 눈이 부시고 금방 피로해진다. 그리고 원고지를 많이 출력해서 쓰다 보니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에게 정말 필요한 종이였다.


조명으로 예를 들자면 주광색과 전구색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주광색은 흔히 형광등색이라고 한다. 전구색은 주황색빛이 도는 따뜻한 느낌의 조명으로, 야간의 카페의 조명, 취침등, 무드등의 색이다.


색감은 창의성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낮에는 자연광만 한 것이 없지만(자연광도 어떻게 보면 전구색이 아닌가), 밤에는 아무래도 형광등 불빛을 의존하게 된다. 원래라면 사람이 잠이 들 시간에 형광등과 컴퓨터 덕분에 강제로 일을 하게 되었으니 현대인들이 병이 생기는 게 아닐까. 옛날 사람들은 반딧불과 눈빛으로 어렵게 공부를 했다지만, 고맙게도 주어진 문명의 이기가 나는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A4용지는 주로 원고지를 출력해서 쓰고 있다. 그리고 공부하면서 필기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 메모지로도 사용한다. 22,000원 / 2,500장 = 8.8원이니 200자나 400자 원고지 한 장에 10원도 안 하는 격이라 상당히 경제적이다. 양면으로 쓴다면 5원 이하로 200자 원고지 두 장, 400자 원고지 두 장을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A4용지는 써도 써도 질리지가 않는 반면, 이상하게 노트(노트 정리도 포함해서)와는 인연이 없다. 매번 기록이나 필기하는데 활용하려고 노력해 봐도 잘 되지 않는다. 노트를 활용하는 용도는 일기를 쓰는 것 말고는 없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노트 필기도 잘한다는데, 공부와 인연이 없었던 걸 보면 아주 신빙성이 있는 말이다.


일기는 노트라는 규격에 담아두어도 거부감이 들지 않지만, 다른 글을 쓸 때는 항상 답답함을 느낀다. 이것은 아마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공개되었으면 하는 의식이 종이를 쓰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 때는 종이에 한계를 느껴서 노션이나 옵시디언과 같은 앱들을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종이로 정착한 느낌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방대한 정보를 가져도 활용할 수가 없다. 가진 자료의 양이 지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너무 많은 재료는 도리어 조립을 어렵게 만든다. 단지 내 생각이 미치는 범위와 그것을 쓰기 위한 종이 몇 장이 필요할 뿐이다.




이미지 출처(© dancristianpaduret, Unsplash)




<참고>

'형설지공', 네이버 지식백과. 2024-02-25 접속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439909&cid=47303&categoryId=47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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