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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의미 Apr 18. 2024

책의 형태는 잘못됐다

다른 것도 볼게 참 많다


정보는 시력과 바꿀만한 것인가


책만 읽다가는 언젠가 필시 눈이 맛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에 대한 욕구와 호기심과는 별개로 책은 내 눈을 사정없이 공격한다. 종이든 디지털이든 똑같다. 두루마리에서 지금의 책이 되고 나서 얼마나 지났나. 문득 책의 형태도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때보다 책에 의미를 부여한다. 정보가 아니라 책이 돈이 된다. 다 알만한 사실들을 모아서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자물쇠를 채워버린다. 어쨌든 '내가' 편집했다 이거다. 보려면 돈 내라 이거다. 사람들은 다 알만한 사실들이 궁금해서 VIP회원 멤버십과 월정액에 가입한다. 강물을 떠다 팔았다는 김선달 이야기의 현대판이다.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소위 '부의 추월차선'을 타고, '경제적 자유'에 가까워지고, '역행자'같은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강물은 매우 잘 팔린다.



누군가가 지나가고 무너진 다리에 집착한다. 지식과 정보에 매달린다. 다산이 말했던 '주견'이라는 것을 세우기가 참 어렵다. 내 뜻을 먼저 세우고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있으니까 그냥 읽는 느낌이다. 적당히 괜찮은 정보, 기분 좋게 내 헛소리를 보완해 주는 권위자의 말들을 찾느라 눈이 빠진다.




정보가 많아서 문제라고 하더니


책을 만 권도 읽지 않았지만(요새는 천 권도 많은 게 아니다) 어떤 책을 읽어도 그 책 한 권이 통째로 필요한 경우는 드물다.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읽을 때마다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없다. 글을 써도 쓴 것을 읽고 고치고, 다시 한참 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읽고 고치는데, 책을 읽는 데는 왜 그런 방식이 통용되지 않을까. 30분 만에 세상 진리를 다 깨쳤다는 소리랑 똑같다. 그것을 소화할 시간은 어디 있는가. 아는 것과 배운 것, 인지하고 있는 것의 구분이 없다.



여전히 책은 정보를 '알아서 찾아라'라는 식으로 제공한다. 그게 사람의 재량에 맡긴다는 자유라면 자유다. 그래서 목차를 만드는데 고민하고 최대한 친절하게 정보의 이정표를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수십 개나 되는 갈래길에서 아무리 이정표를 많이 만들어놓은들 혼란 줄 뿐이다.



책을 디지털로 만들고 문자인식을 적용하고 검색도 되게 만들어 놓지만 종이책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는다. "종이에 적힌  검색이 안 돼서 문제야"라고 하면서 늘 뒤지는 것은 종이나 문서다. 종이책을 사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손으로 다시 쓰고, 타자로 치고, 심지어는 스캔을 하려고 멀쩡한 책을 '파괴'한다. 책을 모조리 잘라낼 수 없으니 이제는 '비파괴'어쩌고 한다.



그러고 하는 일은 디지털 공간에 글자를 잔뜩 쌓아두고 정보의 만석꾼이라도 된 것처럼 만족한다. 그리고 저절로 '지식의 융합'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놓은 책을 다시 데이터베이스라는 형태로 똑같이 옮겨놓는다. 그것이 무슨 지식의 편집이고 창조인가. 도토리를 주울 때마다 묻어놓고 잊어먹는 소동물과 같지 않은가.




정보를 그만 연결했으면 좋겠다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하루종일 씨름하고 정보를 얻었다 싶으면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에 좌절하고 만다. 맥락은 하나여도 늘 다른 것과 이어진다. 예를 들어 '지식'이라는 맥락에는 '정보'라는 키워드도 있고, '책'이라는 매체도 있고, '철학'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삶의 조건'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다. 대안으로 지식을 네트워크적으로 연결하라고 하지만 이미 세상에 정보가 넘친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는 있는 정보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또 새로운 정보를 자꾸 연결하라는 말인가. 문헌과 정보들은 저명하신 강연자나 작가님들의 하드디스크에 가득 저장되어 있다.



정보라 부르기 민망한 것들을 조금씩 꺼내서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고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이 시대의 지성,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분들이다. 그걸 지식의 창조와 편집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자신의 주장은 채 10%도 안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며 마음껏 인용한다. 내 주장이 불리하다 싶으면 쇼펜하우어를 데려와서 떠들게 하고, 또 불리하다 싶으면 옆 집에 사는 니체를 데려오고, 또 그 옆집에 사는 비트겐슈타인을 데려와서 온 세상의 학자와 철학자들을 책을 뒤져 찾아와서 내 편이라고 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1~2시간이면 책을 10권이나 읽는 천재작가들의 하드디스크에는 '검색'되지 않는 것이 없다. 늘 글감이 가득하다. 사후 몇 백 년이 지났건, 천 년이 지났건 테스형이건 상관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돈벌이를 도와줄 망자가 필요할 뿐이다. 되도록 죽어서 유명해진 사람이 좋다. 살아있는 사람의 말을 빌려서 사기를 치려면 '생각'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4시간만 일해야 하는 이들에게 생각하는 일은 너무나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다.



수 십 명의 학자가 평생을 바쳐도 망라하지 못할 고전들을 손가락을 까딱해서 검색으로 모조리 긁어와서는 "나는 글쓰기로 사기를 쳐야 해서 읽을 시간이 없지만, 당신네들은 꼭 원서로 읽어라"라는 헛소리를 한다. 스스로도 해보지 않았으면서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저울질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강도질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어릴 때 어렵게 살았는데 고전을 읽어서 사람이 되었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



고전을 읽으면 얼마나 크게 성공할 수 있는지 아느냐는 등 이야기를 하는데 결론은 이거다. "당신네들이 실패한 것은 고전과 인문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해석을 잘하면 내 덕이고 못하면 너네들 책임이다.



뭐가 어찌 됐든 책을 읽으라고 한다. 심지어는 책을 읽지 않으면 가난해진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책으로 돈을 번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쟁통에는 무기를 파는 무기상이 돈을 벌고, 골드러시 때는 곡괭이와 청바지를 판 사람들이 돈을 벌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책을 읽어서 교양이 생기든 지식의 창조를 하든 말든 그들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무기를 파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기를 산 사람이 어떤 이념으로 대량학살을 하거나 건물을 폭파하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다. 금이 없는 광산에서 금을 못 캐는 것은 '진짜로 금이 있다'라고 생각하며 곡괭이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적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출판사라는 곳도 마찬가지다. 늘 돈이 없다고 노래를 부르며 욕심이 그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이 왜 사양산업이라는 출판업에 계속 남아있을까? 그들은 언제부터 책을 만들다가 '돈'이 될만한 종이를 찍어내기 시작한 것일까. 사명감이 있다는 업계가 "20대(꼭 20대나 30대가 되어야 한다)에 내가 10억을 쉽게 벌 수 있었던 방법", "책 만 권을 읽고 경제적 자유를 이룬 비결"이라는 식의 동영상을 올리는 이들의 책을 내주고 있는가? 영리 목적의 기업이라면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 책들을 계속해서 내는 이유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바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책을 만드는데 어찌 사기꾼들이 안 생길까.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는다.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그곳에 끼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너도 나도 전자책 팔아서 한 달에 700~800씩 통장에 꽂혔으면 좋겠고, 역행자라는 것이 되고, 부의 추월차선이라는 것을 타서 하루에 4시간만 자판을 두들기고도 수십억을 벌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바른말을 하면 오히려 고립되어 공격을 받는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다들 차라리 돈 많고 폼나는 빌런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쉽게 성공하든 어렵게 성공하든 성공했으면 그걸로 된 일이지 왜 그렇게 다들 성공하고 나면 타인에게 함부로 하고 싶어 하는지, 일종의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한(恨)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다. 세상은 그것을 폭력이라고 부른다.



사기꾼들이 가득하다. 책 한 권도 조용하게 읽을 수가 없다. 자기 계발서에 돈이라는 키워드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거기서 말하는 돈은 정당한 노동이나 사업을 해서 생기는 돈이 아니다. 어떻게든 사람을 끌어 모아서 사기를 쳐서 벌 수 있는 돈이다. 여전히 사기꾼들은 금광이 있다고 소리치면서 자신들은 곡괭이를 들고 금을 캐지 않는다. 그들은 금광을 본 적도 캐본 적도 없다. 그럴 생각도 없다. 왜 그런 바보짓을 해야 하는가? 단지 길목에 파라솔이 달린 테이블을 놓고 앉아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들에게 어딘가에 금광이 있다는 장소를 거짓으로 둘러대면 돈을 벌 수 있는데 말이다.




정보가 아니라 책을 만드는데 돈이 많이 든다


맨날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책을 쓴다는 사람들도 책이 많이 팔릴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근데 그 팔리지 않는다는 책들은 중고상들이 쌓아두고 팔고 있다. 중고상들이 정보의 가치를 더 안다. 그 책들이 왜 중요한지 안다. 그들 중에는 책을 안 읽는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 책을 읽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본질적인 가치를 꿰뚫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책 보다 정보의 희소성에 집중하고 그것을 판다.



책을 쓰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정보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책이라는 매체와 가격에 집중한다. 정보가 비싼 것이 아니라 단순히 책을 만드는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이다.



책을 뒤지며 시력을 잃고 건강을 해치는 사람들이 많다. 책장을 넘기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마트폰을 많이 쳐다봐서 눈이 나빠졌다고 하면 덜 억울할 것 같다. 뭐가 되든 일단 하나라도 더 봐야 한다. 또 찾아야 한다. 찾으면 또 정보를 연결해야 한다. 연결하면 편집해야 한다. 두껍게 쓸데없이 묶어둔 책의 형태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나는 오늘도 책에서 낱장의 정보를 추려내느라 시력을 낭비하고 있다. 참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 출처(© centel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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