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으로의 여행
여행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새겨진 길을 따르는 것이다. 아무 데나 가도 좋을 것 같은 물길마저 그 길을 따라 배가 가듯 내 마음대로 어디든 갈 수 없는 것도 여행이다. 길 밖으로 가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 개척이나 탐험이며 생의 한 부분이자 생을 위한 여행보다 죽음을 무릎 쓰고 또 다른 세계와 생을 찾는 것이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일과 후 여행이기에 마음대로 여행지를 선택할 수 없었지만 매주 매일 바뀌는 일터의 주변을 돌며 또 다른 세계를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20241009.
다시 돌아온 공주. 그래도 여행지를 선택할 수 없지만 목적지를 선택할 수 있다. 특히나 휴일에는 더 멀리 갈 수 있어 시내를 벗어나기로 했다.
동료들은 어젯밤에 이어 오전부터 낮술이었다. 나는 낮술을 피해 공유자전거를 찾았다. 얼른 숙소 근처를 탈출해 목적지로 가고 싶었다. 휴일이라 그런가 공유자전거를 찾기 위해 몇 군데를 돌며 몇 킬로를 걸었다. 그 시간이면 이미 식당에 들어섰을 것이다. 공유자전거는 자전거를 타는 여행이 아니라 자전거를 찾는 여행이란 생각이 들자, 그래도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공주의 낮도 빛나고 있었고, 강을 타고 온 바람은 신선했다. 빛과 바람이 낳은 말들이 문득 생각나 멈춰서 기록하는 설렘도 있었다. '애초에 완전한 가짜의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기억을 전달하며 멈춰 선 나를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일단 여행을 가기 위해 배를 채워야 한다. 전에 갔던 북경탕수육으로 갔다. 그 식당의 메뉴를 김피탕이라고 하는데 김치피자탕수육이다. 김치가 올라간 피자맛 탕수육이다.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묘한 독특함이 있다. 시간이 맞아 그곳으로 사장동생을 불렀는데, 밤을 새우고 온 사장동생은 고맙게도 갑사 입구까지 날 태워줬다. 별 것 없는 이 우연의 사건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 돌이켜보면 그전에 낮술을 피해 공유자전거를 찾다 만난 동료가 낮술에 취해 말한 미래를 향한 표지의 한마디가 있었다.
[갑사로 가는 길] 동명의 수필 때문에 갑사甲寺에 가고 싶었다. 기억은 경험한 것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않은 기억 안으로 들어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욕망이 이루어지면 희열이 온몸에 감돌기도 하는데, 아마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스타를 직접 만날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갑사로는 들어가는 어귀에는 머리가 잘린 괴목 槐木(느티나무) 이 하나 서 있다. 이미 죽은 지 오래였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온몸에 넝쿨이 감싸고 있었고, 아직도 영험함이 있는지 한 여인이 두 손 빌며 기원을 하고 있었다. 괴목 옆에 서 있던 두 개의 표지석과 표지판을 읽어보았다. 신비한 이야기이라고 하는데, 괴목의 괴자가 귀신과 관련되어 있다. 두 표지를 합친 내용은 이렇다.
300여 년 전, 음력 섣날 어느 날부터 갑사 대웅전 앞에 있던 장명등長明燈(석등)이 축시(새벽 1시 ~ 3시)가 지나면 꺼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기름이 없어진 것이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스님들은 자시(밤 12시 ~새벽 1시)에 몰래 장명등을 지켜보는데, 구척거인이 장명등 심지를 드러내고 기름에 손대고 있었다. 거인은 기름을 꺼내 발에 바르고 절을 빠져나갔는데, 놀란 스님들이 뒤를 따라가 보니, 거인이 괴목 앞에 사라지고 말았다. 거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괴목의 당산신이었다. 자세히 보니 괴목뿌리가 불에 타고 있었다. 큰스님이 기름을 훔쳐간 연유를 묻자, 당산신은 사람들이 불로 나무의 뿌리에 상처를 내서 발을 치유하기 위해 기름을 가져가 발랐다고 했다. 사연을 알게 된 스님들은 괴목 뿌리에 붙은 불을 끄고 마을 사람들과 괴목 주위를 잘 정리했다. 그 후 갑사의 장명등 기름은 없어지지 않았고 마을에 돌았던 역병도 사라져, 스님과 마을 주민들은 괴목의 당산신에게 매년 정월 초사흘날 제사를 드리고 있으며, 그 풍습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본시 이야기란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알 수는 없다. 진짜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이야기에 속는다. 속는다, 는 말은 마음속으로 들어온다는 뜻으로 속기 시작하면 믿기 시작한다. 가짜가 진짜가 되는 변신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당시 마을에 역병과 변고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피해자인 누군가 화풀이로 괴목에 불을 질렀을 것이고 마침 장명등의 기름도 사라지게 되었다. 누군가 장명등의 기름을 훔쳐간 것 같다. 역병과 변고의 시절은 궁하기 마련이니, 티도 나지 않고 손쉽게 훔쳐가 나름 비싼 값을 치를 수 있는 것이 기름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역병과 변고로 인심이 안 좋아지면 마을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절에 대한 불심도 안 좋아지게 마련이어서, 절에 좋을 리 없다. 그래 갑사의 스님 한 명이 역병과 변고를 다스릴 수 있는 당산신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달랬을 것이고, 이에 그치지 않고 스님들은 그 믿음을 만들기 위해 죽어가는 괴목에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보통 당산제는 살아있는 나무에 하는 것인데, 이미 불에 데어 죽은 나무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니 특이하면서도 죽은 이에 대한 제사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정말 역병과 변고는 없어졌을까.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인데, 상상은 현실로 나타나 힘을 발휘하는 상상력이 되기 마련이다. 스님의 이야기에 속은 사람들은 정말 좋아질 거라고 믿었을 것이고, 믿음은 행동이 되어, 사람들은 힘을 합해 역병과 변고를 몰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괴목 앞에서 두 손을 모은 저 여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갑사로 가는 길] 수필의 제목처럼 딱 갑사로는 가는 길만 좋았다. 적당한 시공이 아니었는지 몰라도 가람에서 풍겨오는 기운으로 정리감과 만사의 망각 같은 어떤 분위기도 자아내지 못했다.
갑사에서 다시 입구로 돌아온 시간은 한마디로 애매했다. 어딜 가자니 늦을 것 같고 숙소로 가자니 시간이 아쉬운. 돌아가는 버스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가만히 있자니 답답해 찻길을 따라 걷다가 오는 버스에 손을 흔들어 타려고 했는데, 가는 길은 인도가 없어 위험하고 피곤만 남아 신경을 건드릴까,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정류장에 본 계룡산의 산자락과 인근의 나무들이 좋아 온 산과 하늘이 날 감싸주는 안온함마저 들었다. 역시 산사에만 부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침 노란 버스가 왔다. 신원사와 갑사, 동학사를 운행하는 셔틀버스였다. 이도 동학사로 정해진 미래의 표지였는지 모른다.
잠시 졸고 나니 버스는 동학사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다른 시공으로 가는 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고 그 길을 따라 누구나 속고 싶고 믿고 싶은 이야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학사 정류장에 내리고도 고민이었다. 산등성이에는 이미 어둠이 밀려올라와 지는 해와 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한판 겨루고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동학사로 가는 길은 이미 어둠의 정찰병이 점령한 듯했다. 사람들은 어둠을 등에 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저 길로 들어서면 귀가의 길은 멀어질 것이다. 돌아오면 버스는 끊겼을 것이고, 차로 가득 찬 주차장은 텅 빌 것이다. 갈까 말까 할 땐 가자. 이왕 왔으니 눈으로도 동학사를 보고 말 것이다.
가지 않았으면 아름다움 하나를 놓쳤을 것이다. 고맙게도 아름다움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았던가.
2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