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오래 앓았다.
햇살이 잘 들고 저 멀리는 공원도 보이는 작은 방을 지키고 앉아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밥을 먹었다.
아이는 잘 웃지 않았다.
점차 적응 해 가며 장난도 잘 치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회진을 가도, 복도에서 마주쳐도, 먼저 인사를 걸어도 익숙할 법도 한 의료진들에게 한 번 웃어주지를 않았다.
어린 아들의 오랜 항암치료에 이미 반쯤은 의사가 되어 다음 치료는 언제쯤 할지, 약에 대한 아이 몸의 반응은 어떨지, 그럼 우리는 뭐라고 말하고 또 무얼 조심시킬지 이미 다 알던 아이의 어머니는 탕비실이나 간호사실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젊은 주치의에게 "선생님은 안 힘드세요," 항상 정중한 말로 나의 안부를 먼저 묻곤 했다. 반듯한 이마와 늘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중단발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가 건강했다면 참 예쁘게 살았을 것 같은 사람인데, 몇 번인가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자주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말이면 아이의 아버지가 찾아 왔다. 아이 대신 병실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 있던 아버지의 모습에 회진 간 의사들은 종종 깜짝 놀랐지만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부스스 일어나 인사도 없이 병실 밖으로 나가곤 했다. 사방으로 뻗치고 눌린 머라카락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않은 채.
"아, 엄마는 참 괜찮은데 아빠는 왜 맨날 저 모양이야," 세상이 아직 쉽던 20대의 주치의들은 환자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이의 아빠를 도마 위에 올렸다.
아이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밥을 먹고, 검사를 하고, 약을 맞고,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코피를 쏟고, 토사물을 뱉어내고, 산책을 하고, 동생과 장난을 치고, 매일 비슷한 시간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의 엄마는 바뀐 계절에도 똑같이 종아리를 덮는 길이의 얌전한 치마를 입었고 아이의 아빠는 옷 차림이 몇 번쯤 바뀌었나, 여지없이 아이의 침대를 차지하곤 했다.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강가의 바람은 시원했고 산책길의 나뭇잎도 누릇누릇 빛이 바래갔으나 아침 햇살은 눈이 부시고 한낮의 하늘은 여전히 뜨거워 병원 안에서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름도 가을도 아니던 계절, 아이가 큰 한숨을 쉬고 이내 초점을 잃었다. 매 고비 힘겹고 초조했을지언정 몇 번이나 함께 넘겨 낸 일이었기에 병동의 모든 의사들이 달려들었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지만 이번에는 아이의 호흡이 그보다 빨리 달아났다.
돌아오지 않겠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이를 지켜 본 의사들은 그 순간을 동시에 느낀다. 아이가 다치지 않고, 부모의 마음도 다치지 않는 정도의 초라한 심폐소생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간은 특별히 더 천천히 흐른다. 누군가는 비현실적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또 누군가는 비현실적으로 느리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오열과 거짓말 같은 고요가 공존하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아빠의 또렷한 눈빛을 보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침대 난간에 매달려 오열하는 아내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간신히 지탱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엄마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장모님, 지금 바로 좀 와 주세요, OO이가 갈 것 같아요."
절박하고도 담담하게 전하던 그 목소리, 눈빛. 엄마의 오열보다, 아이의 마지막 숨결보다 어쩌면 더 극적으로 흔들리던 아빠의 눈동자.
빤히 보는 나의 눈빛이 느껴졌는지 1초도 안 될 짧은 시선이 오고 갔지만, 슬픔인지 원망인지 모를 아버지의 눈을 오래 생각하기에 나에겐 정리해야 할 차트와 서류가 너무 많았고, 나는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닥친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아침을 먹은 기억이 없지만, 점심을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스테이션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등 뒤로 아이가 영안실에 조금 늦게 내려갈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병실이 있는 병동 구석으로 걸음을 향했다.
유난히 항암병동 순환 근무가 많았던 전공의 시절의 나는 이미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아이들과 아픈 작별을 했지만 내가 안아 위로하고 나를 안으며 슬퍼하던 이들은 모두 엄마였다. 아버지들은 절반쯤 뒤늦게 도착했고, 절반쯤은 어딘가에 나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아픔과, 주치의로서 나의 슬픔과, 즉시 정리해야 할 일들에 파묻혀 그들을 찾지는 않았다. 비극의 주인공은 아이였고, 엄마였으며, 차라리 야속하도록 선명한 사망선고 순간의 벽시계일지언정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던 아버지의 자리는 그 장면에 상상 할 여력조차 없었으므로.
그런데 그 복도의 끝에서 나는 멀리 보이는 하늘과, 세로로 긴 사각형의 창문과, 그늘 진 뒷모습이 합쳐져 흡사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asper David Freidrich, 1817)처럼 홀로 선 아버지의 어깨를 보았다. 사회생활이라고는 일천한 스물 일곱의 전공의.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빠와 제법 가까웠고, 그럭저럭 무난한 딸로 자라 갓 결혼은 했으나 아직 어머니는 되지 못한, 모두에게 공감하기엔 뭔가 어정쩡한 포지션의 나는 그 장면에 어찌할 줄을 몰라 가만 멈춘 채 한참 동안이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돌아본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얼룩 져 있음을 멀리서도 바로 알아챌 수 있었기에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뒤로 도망쳐야 할지 알 수 없어 다시 한 번 얼어붙었던 것 같다. 그는 한마디 말도, 눈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나를 스쳐 복도로 나갔고 그 복도에는 거짓말 같은 적막만이 남았다.
어째서 몰랐을까.
아이가 떠나고, 가족들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절망과 고통이 지배하는 시공을 마지막까지 추스르는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온 정신을 부여잡으며 남은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슬픈 소식을 전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서류를 정리하고, 병원비를 결제하고, 영안실 직원과 장례 절차에 대한 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일. 보이지 않는 사이에 아버지들이 해야 했던 그 많은 일들을 나는 어째서 몰랐을까.
그리고 십 수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이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꼭 그 만큼, 수 많은 가족의 고통을 함께 겪고, 생각보다 많은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켜야 하기도 했다.
여러 일을 겪을수록 감정은 무뎌지고, 복잡한 삶은 많은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뒷모습에서 아버지의 어깨를 먼저 본다.
당신의 어깨 위에도 마땅히 와야 할 위로의 손길이 너무 늦지 않기를,
혼자 떠안고 흐느끼는 밤이 너무 많지 않기를,
힘들면 힘들다 말할 수 있는 용기와 평안이 당신의 마음에 깃들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