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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ison Lee Nov 25. 2021

아버지와 딸

아버지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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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빠에 대한 기억은,


동성로 중앙파출소 앞 대형서점에서

하루 종일 내가 책을 고르고 읽는 동안

같이 책을 읽다가 신문을 보다가

나도 봤다가 먼산도 봤다가 하며

멀찍이 떨어져 내 주위를 맴돌던 눈동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입시학원에 다닐 때에도

영화 보고 싶어, 바다 보고 싶어, 하면

일요일 저녁에조차 망설임 없이

어디로든 운전대를 잡아 주던 뒷모습.


대학교에 들어가 의외로 술을 잘 마신다는 걸 안 뒤

본가에 갈 때마다 맥주 몇 캔씩을 앞에 두고

새벽 두 시고 세 시고 이제는 기억도 안 날

시답잖은, 웃긴, 진지한, 날을 세우는, 내밀한 이야기들을

밤새 나누던 식탁 조명 아래의 그림자.


-


학창 시절의 나는 특별히 눈에 띄거나

인기가 많은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성친구 한 명 만나보지 못한 채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에도

학번 내에 '단 4명' 뿐인 현역 여학생이라는

독특한 포지션으로 잠시 주목을 받기는 했으나

동거 동락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게 되는

의대의 특성상

남자 사람 친구들의 연애 상담을 해 주면 해 줬지

그 상대로 내가 거론되거나 고백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무룩)


그 시절 20대의 연애란

남자 쪽에서 매우 공격적으로 구애를 해야만

성립이 가능했기 때문에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리 나 혼자 외롭고 설레고 북 치고 장구친들

나타나서 먼저 고백하는 놈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천한 연애경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행히 아주 안전한 만남들을 통해

존중받고 사랑받는 연애와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에는 그냥 감사하다고만 느꼈던 과정들이

이제 와 딸을 키우며 복기 해 보니

그건 다 내가 평생에 걸쳐 아빠로부터 받은

‘Indivisualized 연애 교육’의 산물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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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가 받은 사랑이란

아빠의 지지, 엄마의 헌신,

남동생의 ‘져 줌’ 같은 종류의 것이었는데,

모든 가족이 색깔은 다를지언정

딸과 누이를 똑같이 아끼고 사랑했겠으나


내겐 56년생 경상도 남자답지 않았던

‘아빠와의 데이트’가 하나 더 있었다.


서점과 영화관, 계곡과 바다,

그리고 식탁 위의 술자리로 연결되며

십수 년간 이어진 아빠와의 데이트는


내가 아빠의 배려와 사랑에 익숙해지게 했고,

그걸 타인에게도 ‘잘’ 받을 줄 알게 했다.


그 반복학습은

남초 집단에서 오래 지내야 했던 20대에

의외의 부분에서 빛을 발했는데,


얘가 나한테 이러는 게

나를 정말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

그냥 친절한 사람의 친절한 행동인지,

지나가는 치기나 승부욕인지,

가벼운 장난이나 혹은 무례한 희롱인지를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고


그 예민한 지각은

수많은 목소리들 사이에서 스스로 나를 지키고

무의미한 연애사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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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성으로서 그 관계가 나를 키워 준

중요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아빠와의 길고 깊은 대화는

남자들의 관심사와 생각의 흐름 속에

나를 부지불식 간 동화되게끔 만들었는데,

나는 때로 아빠 친구분들과의 자리에도

종종 주스 한 잔 들고 앉아 아무렇지 않게 끼었으니,

‘어른 남자’들의 대화 속에 무심히 오가는

그들의 일과,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고뇌에

조금이나마 눈을 뜨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나아가 남성 연장자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적당한 예의와 선을 지키면서도

기껍고 유쾌하게 함께할 수 있는 경험이 쌓인 것 같다.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상급자들은

당장 학부시절의 교수님들부터 시작해

‘연장자 남성’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평생에 걸쳐 훈련이라면 훈련되었을 나의 성향은

구체적인 이득을 떠나

내 마음가짐과 정서를 편안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내 사회생활의 가장 강력한 장점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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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엉뚱한 놈의 희롱이나 의미 없는 손짓에 설레

마음 상하거나 실족하지 않고

진심을 가려 잘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타인의 배려를 감사히 잘 받거나 나이스하게 거절하고

그 마음이나 호의에 더 잘 보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상황이나 감정에

그 위치를 떠나 잘 공감하고 어울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딸에게


아빠의 넘치는 사랑을,

오래 자세히 지켜 봐 주는 관심을,

깊고 유쾌하며 다이나믹한 대화를,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줄

아빠와 단 둘만의 데이트를 자주 선물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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