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대한 예의를 찾다.
14. 시험 전날 밤의 순박함, 예고된 이판사판.
학력고사 결과는 조용히 받아들였다.
소박한 점수로 목표 대학교를 정하고 친구 셋과 함께 도시로 시험을 보러 떠났다. 밤을 지새울 작정으로 참고서를 바리바리 챙겼다.
1박 2일의 낯선 도시의 여관방은 공부방이 아니라 한껏 설레는 소풍지가 되었다.
하필 식당에 갔는데 미역국이 나왔고 군것질거리를 사는데 바나나는 왜 그리도 먹음직스러웠는지 시험 전날 금기되는 음식들을 거리낌 없이 먹어 치웠다.
Tv에서는 밤새 야한 영화가 나와서 낯부끄럽다며 키득거리다 잠들었으니, 가슴뿐 아니라 뇌까지 순박한 우리들이었다.
드디어 시험 당일, 넷 중 가장 생각이 깊은 하얀 얼굴의 친구가 지원한 학교로 먼저 출발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하필 버스 번호판에 2848 (이판사판)이 적혀 있었고. 망설일 틈도 없이 올라탔는데, 곧바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고 했다.
"하~이번 생은 망했겠구나"
인생 갈림길의 첫 사건은 모두에게 2848이었다.
시험을 마치고 같은 학교에 원서를 넣은 친구의 고사실에 갔다가 친구가 시험을 안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분명히 같이 도착했는데 무슨 일이람?"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두근두근 나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황급히 여관방에 갔더니,
화장실에서 손에 거품을 잔뜩 묻히고 빨래를 하고 있지 않던가?
"왜? 뭔 일, 아 뭐야?"
"그게 있지.."
화장실 갔다가 고사실이 헷갈려서 겨우 찾아 들어가는데, 선생님들이 시험지를 팔에 끼고 '착착 착착'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울먹거렸다.
어차피 "네가 붙어도 내가 떨어지면 안 간다고 했기 때문에 그냥 왔어".
" 아, 미쳤나 봐"
"근데 웬 빨래?"
"불안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사실을 모르시고 결과만 애타게 기다리시던 친구 부모님은 학교에 전화를 하셨는데, "그 학생 시험 안 봤습니다"가 아닌 "명단에 없습니다" 했다고. 부모님께는 너무나 죄송스럽지만,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가장 큰일인 것 같았다.
당시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아찔했지만 그 시절의 우리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짝 없이 낯선 곳에서 나 혼자 대학생활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 그럼 나도 안 가지." 합격을 확인했지만, 나는 가까스로 등록금을 준비한 엄마에게 가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다.
15. 본격적인 화장, 산소 아니고 참이슬 같은 여자.
기초화장품 <순정>을 사들고 오던 날은 말도 못 하게 설렜다. 아무 향도 나지 않는 그 스킨을 들고 계속 킁킁대며 코를 박고 맡아대면서도 유리병이 깨질까 애지중지했다.
이노센스인지, 미네르바인지, 마몽드인지 <투웨이케익>과, 팥죽색 립스틱도 샀다.
뺨 위에 콕콕 박혀있던 내 주근깨,
'있었는데 없었다' 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양쪽 눈썹에 갈매기 날개까지 얹으니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서툰 모양으로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갔다.
현란한 빛과 색. 신세계를 경험한 거다. <화투>에 빠지고 <라밤바>에 빠지듯, 빠져버렸다.
여러 번 가다 보니 생일날엔 빵빠레도 울려주고, 나이트 직원들 퇴근할 때 같이 퇴근하면서 국밥이라는 것도 처음 먹어봤다.
새벽까지 이런저런 방법으로 스무 살 여자 청춘들이 술을 마셔댔다. 여기저기 토하기도 많이 토했다. 심지어 엄마가 애지중지하시던 화분 위에 양분을 많이 쌓아 드렸다.
다음 날이면 잃어버렸던 소지품들 하나하나 찾으러 라운딩을 다녀야 했고, 서서히 노는데 지쳐갔다.
그제야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공부하러 도시로 떠났고, 한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한 친구는 매일 백합화에 둘러 싸여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 가장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나의 재수 생활도 후반기가 되어서야 '인생은 무엇인가'... 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었다.
백합화 친구랑 삼수를 시작했다.
16. 고속버스 바퀴가 던진 질문
서울로 향하던 고속버스 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눈에 옆 차선에서 거침없이 너무나 빠르게 굴러가는 버스 바퀴가 들어왔다.
무생물인, 저 고무덩어리 밖에 안 되는 바퀴조차 제 소임을 다하느라 저토록 치열하게 구르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바퀴의 열정'이 훅하고 가슴에 박혔다.
"이거는 내 인생에 예의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 길로 수학과 영어 학원에 등록했다. '수포자'였던 내가 삼수에 뛰어든 순간이었다.
영어 선생님이셨던 원장님은 나에게 갑작스러운 고백을 하셨지만, 이번엔 빠져들지 않고 서툴게 웃으며 넘겼다. 그래도 끝까지 가르쳐주신 덕분에 영어와 수학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원장님은 짝사랑은 실패하셨지만 교육자로서는 훌륭하셨다.
그렇게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길, 간호학과로.
만약 그날, 첫 합격한 학교(중문학과)에 갔었더라면,
고속도로 위에서 그 뜨거운 바퀴의 회전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 밤, 그때 친구들의 투명한 웃음소리와 그 버스 바퀴의 진동이 다시금 느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