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똥차 이야기: 가스라이팅녀
"나 진짜 궁금한 게 있어. 그렇게 소개팅을 많이 했는데 사귄 사람은 없는 거야?" 자작해진 오뎅 국물을 뒤적거리던 친구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야 당연히 있지" 나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문제는 관계가 오래가기 힘들다는 거야." 옆자리에 앉은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좋을 때다' 씁쓸해진 입안을 물로 헹궜다. "사귄다는 건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는 거야. 그런데 서로에 대해 깊이 알기도 전에 연애를 시작해야 하니 그게 힘든 거지"
흔히 '삼프터 후 고백은 진리'란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세 번의 만남이 끝나기 전에 사귈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 만에 승부를 본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왔을 때 빨리 붙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오래된 가이드(?)다. '타이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말은 동시에 소개팅의 맹점을 찌르기도 한다.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이다.
소개팅의 치명적인 한계가 여기서 등장한다. 상대방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연애를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만남이 쉬운 만큼, 관계 자체를 가벼이 여기는 무책임한 사람들도 등장한다는 사실. 그들은 지뢰와 같이 위험한 상태로 도처에 깔려있다. 인연을 쇼핑처럼 여기는 사람들. 연애를 원하는 매력적인 이성은 어디든 널려있단 생각에,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는다면 사귀고 나서도 항상 도망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우린 그들을 가리켜 '똥차'라고 부른다.
첫 번째 만남: 지각
A를 만나게 된 건 아는 동생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첫 만남은 약속 시간을 20분 정도 지나서였다. 지각을 했단 사실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지만, 잠깐의 긴장감은 술이 들어가면서 한결 느슨해졌다. 그녀는 스케줄 근무를 하고 있었고, 새벽 출근과 주말 근무를 하는 날이 많다고 말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다고도 했다. '그럼 어떻게 나온 거냐'라는 질문에, '친구가 소개해준 사람이니 믿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 사람 같아 보였다.
취미는 잠수에요
며칠 뒤 주말, 우리는 점심에 만나기로 했다. 그날은 A가 아침 일찍 시험을 보는 날이기도 했다. 문제는 전날부터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잠들었을 텐데..' 약속시간은 가까워지고 있었고, 대화창의 1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결국 약속시간이 다 돼서야 연락이 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연락하면 안 되는 건가?'란 생각도 들었지만, 사귀기도 전에 주제넘는 것 같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딘가 쎄한 구석이 있었다. 지나고 보건데,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은 결말 또한 파국이었더라. 당시엔 경험치가 부족했던 탓이었다. 결국 삼프터의 법칙이 그날을 1일로 인도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세 번째 만남, A는 함께 있는 순간에도 정신이 온통 핸드폰에 가있었다. 누구인지도 모르겠는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같이 사진을 찍고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면서도, 맞팔을 하자는 나의 제안에 '싫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확실히, 그녀는 나를 멀리하고 있었다.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과거사 대방출
네 번째 만남, 저녁을 먹는 두 시간 동안 나는 그녀의 화려한 전 남자친구들의 히스토리를 듣고 있어야 했다. 운동선수, 전문직, 심지어는 자신의 친구까지. 이런 사람도 만나봤다는, 일종의 과시처럼 들리기도 했다.
"왜들 그렇게 내가 좋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근데 내가 많이 만나보니까 다 거기서 거기더라."
"그러니까 나보다 좋은 사람 생기면 언제든지 떠나. 난 보내줄 수 있어."
* 전부 실제로 한 말
의심이 확증이 되는 순간이었다. 마음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줄마저 '탁'하고 끊겼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고민 끝에 이 관계를 끊어내기로 결정했다. 전화를 걸었고, 그녀가 받았다. 헤어지잔 말에 A는 눈물로 화답했다. 앞으로 연락을 잘하겠다며, 잘 만나보고 싶다는 말에 바보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소개팅에 지칠 때로 지친 상태였다.
다섯 번째 만남, 그리고 헤어짐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진 A는 8시간이 넘도록 답장이 없었다.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땐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뭘 하고 있었냐는 나의 질문에, '그냥 쉬었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쉰다고 이야기해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에 또다시 반복된 잠수.
답장을 기다리다 밤을 지새웠고, 출근한 지 한참 지났을 그녀에게선 여전히 답장이 오지 않았다. 결국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너무 성급하게 사귀기로 해서 나에 대한 마음이 충분히 생기지 않은 것이라면,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기다렸다는 듯 A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 원래 연락 잘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했잖아. 이해해 줄 수 있다며?"
"그래서 만난 건데, 결국 똑같네. 난 맞춰가는 연애 같은 거 하기 싫어."
"맞는 사람 만나. 나는 나랑 맞는 사람 만날 거야"
순간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온몸을 타고 내려갔다. 손 쓸 도리도 없이 곧바로 차단까지 당했다. 최악의 이별이었다.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막상 말하고나니 모든 게 나의 잘못인 것 같았다. 내가 예민해서 그런 것이냐며, 내 자신이 이렇게 집착이 심한 줄 몰랐다고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친구는 “걘 회피형 인간일뿐이고, 너가 당한 건 가스라이팅이야”라고 친절히 짚어 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나와 맞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아니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있다면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춰주는 것일 뿐이다. 연애란, 다른 세상을 살아온 남녀가 각자의 차이를 받아드리고, 그 다름마저 사랑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어나는 갈등은 지난하지만, 관계의 밀도를 더 단단히 만들어준다. 그것이 두려워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회피형이라는 것을 A를 통해 알게 됐다.
며칠 지나지 않아 주선자를 거쳐 A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생각해보니, 사라진 8시간의 행방과도 관련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녀의 컬렉션 리스트엔 그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올라가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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