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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재 Dec 09. 2021

소개팅 중간에 도망쳐야 했던 이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때는 죄송했어요.



소개팅에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 남자가 애프터를 신청하고, 여자가 응하는 게 '국룰'인 이 바닥에서 가장 깔끔한 이별은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페이드 아웃하는 것이다. 애써 돌려 말하거나, 모진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얼굴을 맞댄 자리에서 적극적인 상대를 만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면전에 대고 '그쪽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상대방이나 주선자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그러기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럴 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원망스러운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비는 것이 최선이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소개팅이 어려운 이유기도 하다.





때로는 인내의 범위를 넘어서는 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 시간을 참고 버틸 것인가, 아니면 솔직하게 말할 것인가?선택의 기로에 놓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도망’을 선택했다. 이 이야기는 그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고백이다.


발단은 학교 선배의 연락이었다. 일전에 한 차례 소개팅을 주선해준 적 있던 선배는 '그때 잘 풀리지 않아 아쉽다'며, '괜찮으면 AS를 해줄 테니, 자신의 회사 후배를 소개받아보지 않겠냐'라고 물었다. 단, 사진은 없다는 조건이었다.


고마웠지만, 두려운 제안이었다. 사진을 제대로 보지 않고 나갔다가 낭패를 봤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위험한 제안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선배는 그 친구가 원래 사진을 찍지 않는 성격이고, 자신이 보장할 테니 믿어 보라며 나를 설득했다(이때 멈췄어야 했다!). 앞선 소개팅 상대가 제법 맘에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래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한번 나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라는 생각에 OK를 외쳤다.


사실 진정한 'Blind' 데이트는 처음이었다. 오히려 조건 없이 사람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지 않던가. 주인공들이 어둠 속에서 운명적인 충돌을 하게 되는 그런 만남 말이다. 나에게도 운명이 찾아오길 바랬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한 장면


하지만 영화는 영화였고, 이곳은 현실이었다. 그녀는 이상형이 아니었다. 인정한다. 외적인 모습이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성격, 취향, 가치관  다양한 요소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나 친구가 아닌 연인을 만나기 위한 자리인 만큼, 소개팅에는 포기할  없는 각자의 기준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외모일  있으며, 학벌이나 직업이   있다.  기준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다.


너무 조건만을 따지는  아니냐 묻는다면, 사실  말은 없다. 이따금씩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을  느껴지는 찌릿함은 다른  잊게 만들고, 관계를 진전시키기도 한다. 다만 그녀와의 대화 코드 역시 맞지 않았다는게 문제였다.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대화는 위성처럼 주변을 쉬지 않고 맴돌았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부담스러운 이야기에 결국엔 집에 가고 싶은 생각마저 솟구쳤다. 그녀는 식사 도중 처음 하는 소개팅이 너무 떨렸다며 나에게 마카롱 세트를 선물로 건넸다. 체할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도저히 2차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쯤에서 헤어지자고 말하자니 미안한 마음에 그럴 수 조차 없었다.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을 때 결국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비겁한 행동이었다. 1차를 마무리할 즈음 화장실에서 회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5분 뒤에 전화해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해달라 부탁했다.


몇 분 뒤 전화가 왔다. “아 넵 부장님~” 친구의 이름은 00 부장님으로 미리 바꿔논 상태였다. 발연기도 이런 발연기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일이 생겨 이만 가봐야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했고,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거짓말과 함께 지하철을 향해 뛰었다.


“먼저 일어나서 죄송해요”


집으로 가는 경의중앙선을 기다리며 미안한 마음에 기프티콘을 보냈다. 대화 기록을 지우고 번호까지 지웠지만, 죄책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답장이 와있었다.


“괜찮아요! 바쁘실텐데 일 마무리 잘하세요!”


스크린 도어 사이로 새어 나온 눅눅한 바람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쓴웃음과 함께, 손에는 여전히 마카롱이 쥐어져 있었다.


다음날 선배는 어떻게 그렇게 집에 갈 수가 있느냐며 화를 냈다. 변명을 해보았지만, 뻔해 보이는 거짓말이라는 게 분명해 보였을 것이다. 상대방 역시 상처받은 것이 틀림 없어 보였다. 결국 더 큰 화를 부르고만 것이다.


 날의 기억은 여전히 미안함과 후회로 남아있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는 오히려 솔직한 표현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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