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책 한 시간 다 읽었어요. 이제 핸드폰 해도 되죠?”
“오빠 우리 핸드폰 40분....”
“야, 나한테 신경 끄고 너 할 거나 해.”
동생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볼 생각도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하곤 쌩하니 들어간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내 아들이지만 진짜 이럴 땐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엄마, 왜 기쁨이랑 행복이는 핸드폰 40분이나 해요? 나는 30분 밖에 안 했는데?”
“내가 아까 그래서 오빠한테 말해주려고 했는데 오빠가 내 말 듣지도 않고 나한테 뭐라고 했잖아.”
“그래, 아빠가 보기에도 너 아까 좀 너무 했어.”
어렸을 때 맑음이는 동생들을 참 잘 챙겼다. 특히 동생들이 태어났을 때 질투 한 번을 한 적 없고 때리거나 꼬집거나 해코지한 적도 없었다. 누워있는 동생에게 모빌을 틀어주기도 하고 본인의 장난감을 양보하기도 하고, 밖에 나갈 땐 손도 잘 잡아주는 정말 스윗한 오빠, 형아였다. 그랬던 아들이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슬슬 동생들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횟수가 늘더니 초6 말부터는 둘째 기쁨이를 아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동생이 하는 말은 끝까지 듣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기쁨이의 부족한 면만 쏙쏙 골라 툭툭 내뱉는 말로 자존감 하락의 일등 공신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고 아주 작은 양보와 배려조차도 허하지 않는 야멸차고 냉정한 오빠가 되어가는 맑음이. 하는 말마다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굳이 그 말을 해서 동생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말들은 어찌나 그렇게 잘 골라하는지 둘째 기쁨이에게만은 찬바람이 쌩쌩 불어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등이 오싹해지게 만드는 재주가 생긴 맑음이다.
기쁨이 눈엔 늘 자랑스러운 오빠, 자신감이 넘치고 리더십 있고, 사회성까지 뛰어난 오빠였다. 자신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기쁨이 눈에 ‘오빠는 뭘 하더라도 다 잘해 보이는 콩깍지’가 씌인 기쁨이는 오빠가 함부로 할 때 소리 지르며 우는 것 말곤, 엄마에게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 동생과 사이좋은 남매는 아니었다. 길을 지나가다 마주쳐도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게 너무도 당연했고 누가 물어보지 않으면 서로가 가족임을 굳이 말하지 않았던 우리.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말 외에는 서로 하지 않았던 동생과 나. 나는 여동생이나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남동생은 형이나 남동생이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곤 했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하나가 있는데 그 일로 동생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으니... 아빠와 63 빌딩에 갔다 사 온 금고형 저금통이 하나 있었는데 용돈을 받으면 하나도 쓰지 않고 그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사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았고, 먹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조금씩 모았던 용돈을 세고 또 세면서 어린 나이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몸소 알아가던 나날들. 학교 다녀와서 한 번, 학원 다녀와서 또 한 번, 속상할 때, 우울할 때 수시로 들여다보며 적은 금액이었지만 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나만의 보물상자가 되어 준 검은색 네모 저금통.
그날도 조신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나의 보물들의 안녕을 확인하려고 띠리릭, 띠리릭 금고를 돌려 뚜껑을 열었는데, 싸늘하다. 빼꼼 고개를 내밀고 나를 반긴 건 낯선 종이 쪼가리 하나.
(하지만 아직까지 난 그 돈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왜 어른되서야? 지 용돈 받으면 바로 갚아야지!!!)
꽁꽁 숨긴다고 숨겼던 비밀번호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챈 건지, 나름의 예의를 차리며 만행을 저지른 남동생에게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따지지도 못하고 그렇게 나의 몇 개월의 용돈을 홀라당 날리고 말았다.
그 후로 더 웬수같은 사이로 발전한 우리. 그렇게 남보다 못한 사이로 20년을 넘게 지내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의지할 사람은 서로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고 지금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꼭 잊지 않고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엄마가 우리에게 주고 가신 선물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서로의 소중함을 다 커서, 가장 잃고 싶지 않은 존재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깨달은 동생과 나.
서로 남남처럼 지냈던 시간들을 후회하는 동생과 나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아무리 말해줘도 ‘응’이란 한마디로 끝내버리거나 ‘엄마랑 삼촌도 그랬으니까 우리처럼 싸우는 게 당연한 거야.’라는 그럴싸한 말로 응수하는 맑음이. 그럴 땐 밀려오는 한숨만 내쉴 뿐. 언젠가 아이들도 깨닫는 날이 올 거란 걸 알지만 괜히 마음만 조급해진다.
“엄마, 나는 왜 언니가 없어? 우리 오빠 같은 사람 말고 나는 000같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
오빠와 다툼이 생길 때마다 엉엉 우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래, 나도 그랬단다.’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고 그때마다 하는 말이 있으니,
“기쁨아, 오빠는 지금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야. 곰이 백일 동안 쑥이랑 마늘만 먹고 사람 된 거 알지? 오빠도 지금 그런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오빠가 더 멋진 사람으로 발전하기 위해 이런 과정을 꼭 거쳐야 하거든. 우리가 조금만 참아주자.”
오늘도 맑음이는 사람이 되어가는 곰의 모습을 하며 포효하고 있고, 나는 열심히 기쁨이의 성난 마음을 진정시킨다. 언제 정신 차릴래 이것들아 라는 소리 없는 외침을 날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