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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조 May 06. 2023

엄마에게 화가 난 걸까, 엄마가 슬픈 걸까.

국립대 교직원이 뭐길래


그러니까 내가 아직까지도 이 길을 걷고 있을 줄은 몰랐다. 

30대 후반까지도 이 길 위에 있을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다.



여기는 서울 '특별시'도 다른 어떤 '광역시'도 아니다. 우리 반 아이들 표현에 의하면 이곳은 '그냥 시' '쪼그만 곳' 그런 지방 소도시이다. 경기권도 아니고 저 아래  어딘가의 소도시.


노란 체육복을 입고 초등학교에 등교하며 어떻게 하면 하굣길에는 내 뒤에 붙은 동생 놈을 떼어 낼 수 있을까 궁리하던 그 길.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얘를 놓고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길을 아직까지 걷고 있을 줄이야. 


아침마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뛰어나왔다. 겨울이면 큰길까지 오는 길에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다 얼어버렸다. 결국은 늘 택시였다. 중학생의 한 달 용돈은 대부분 지각을 면하기 위한 택시비로 탕진되었다. 그 길이다. 


그러니까 그 길 위에 집을 샀다. 살고 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30년 살 집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길이다. 나는 아직 여기다. 



고등학교 때 가장 멀리 대학에 간 사람은 나였다.

기필코 이 '그냥 시'를 떠나고 싶은 사람도 나였다.

가장 멀리 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나는 멀리멀리 도망갔다.

우리 집에서 직행 버스도 없는 그 어딘가로 도망갔다. 도어투도어로 5시간에서 6시간쯤 걸리는 그런 곳으로 도망쳤다. * 그곳 역시 '그냥 시'였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멀어지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만 돌아와 있었다. 

남아있던 이들은 다 사라지고 

나만 

돌아왔다.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이십 대 초반까지 내 삶의 모토는 '유니크'였는데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고 있다. 물론 나는 지금 내 삶에 굉장히 만족하고 행복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보지 않았던 길에 대한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3 때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이 있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그날만큼은 옥상문을 열어 두셨다. 옥상에 올라가서 J에게 전화한 기억이 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나는 성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잘 될 거야."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가고 싶던 대학을 포기했고, 엄마의 의지에 따라 교대에 갔다.

내가 내 삶에서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시기가 있다면 휴학 1년과 임고에 실패했던 시기동안 원 없이 놀던 몇 년의 시간들. 그리고 엄마가 내 삶에서 제일 안타까워하는 시기는, 휴학 1년과 엄마가 내 삶이 실패했다고 여기던 그 몇 년의 시간들. 내가 실패한 건 임고였는데 엄마가 실패라고 여겼던 건 나였다.


가끔은, 내가 교대에 가지 않았다면 하고 싶었던 일을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힘들더라도 더 반짝이고 있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내 동생이 엄마의 뜻을 못 이기고 결국 자신의 결정을 접었기 때문이다. 지방 국립대 교직원인 우리 집 아들이 직장 내 상사의 괴롭힘을 참다가 참다가 결국 일반 행정 (동사무소, 구청 공무원)으로 이직을 신청했는데 지방국립대 교직원 명함을 선호하는 엄마의 반대로 이직을 철회했다는 이야기.


내가 보기엔 그 공무원이 그 공무원인데 그게 그거면 좀 더 편하고 꿀 빠는 게 세상 최고인데 엄마는 그 명함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이직을 철회했다는 연락에 답장한 엄마의 카톡을 보고 나는 갑자기 참 슬펐다. 


수개월을 참았는데 또 참아야 하는 동생이 슬펐고 언젠가 결국은 엄마가 감당해야 할 동생의 원망이 슬펐다. 


못 가본 길에 대한 후회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이 아무리 행복해도 내가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아쉬움은 두고두고 내 발목을 잡는다. 내가 조금만 불행해지면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에게 온갖 합병증이 생기는 것처럼 그렇게 과거에 대한 후회가 나를 잠식한다.


나는 내 동생이, 그렇게 후회로 잠식되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의 카톡이 나를 화나게 했고, 맥주를 마시게 했고, 일기를 쓰게 했고.

그리고 우리 집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네.

 

제일 슬픈 건, 비 오는 평일 밤에 엄마는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난 시아버지 제사에 가고 있다는 것. 감기에 걸려 목소리도 안 나오면서 그 멀리까지 또 가고 있다는 것. 그런 엄마에게 국립대 교직원이라는 명함이 어떤 의미일지 내가 자꾸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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