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춰보기 꺼려지는 역사가 있다. 노예제도가 그중 하나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고 믿기 어려운 사실이기도 하다. 자신이 죽인 딸의 비석에 한 단어를 새긴 흑인여자가 있다. 그 단어는 ‘빌러비드(beloved)'이다. 작가 토니 모리슨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모티브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 젊은 엄마 마거릿 가너는 노예로 살다 도망쳤고 그녀는 주인의 농장으로 자식들을 돌려보내느니 차라리 그중 하나를 죽여버린(그리고 나머지 자식들도 죽이려고 한) 혐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재판은 도망노예를 소유주에게 송환하도록 한 도망노예법에 맞서는 투쟁에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그녀의 온전한 정신과 뉘우침 없는 태도는 신문뿐만 아니라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의 생각은 매우 단호했다. 또한 그녀의 발언으로 판단하건대, 지성과 잔혹성, 그리고 자유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불사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에는 유령이 등장한다. 흑인 도망노예인 엄마의 손에 죽은 아이이자 묘비에 ‘빌러비드’라고 쓰인 아이의 유령이 엄마에게 나타나고 그녀의 삶을 흔든다. 그 유령은 엄마에게만 나타나는 정신착란과 같은 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엄마의 딸, 이웃의 흑인들에게도 그 유령의 존재는 보인다. 작가가 논픽션을 모티브로 쓴 픽션에 유령이라는 존재를 심어놓은 것은 노예제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노예로 살았던 이들의 가슴에 유령처럼 도사리는 음침하고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와 상처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더럽혀져서 자신을 좋아할 수도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게 되었던 그들의 삶은 마치 유령과도 같은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읽는 내내 차올랐던 감정이 결국은 책을 덮었을 때 눈물로 터져 나왔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중에서
그녀가 직접 골라 무덤처럼 두 무릎을 활짝 벌린 채 발끝으로 기대섰던 비석. 손톱처럼 분홍빛이 감돌고 흩뿌려진 돌가루가 반짝이던. 십 분이오. 남자가 말했지. 십 분을 허락하면 공짜로 해주겠소.
네 글자를 새기는 데 십 분. 십 분을 더 허락했더라면 ‘디얼리’란 글자도 새길 수 있었을까? 그때는 남자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못했지만,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는 미련이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이십 분, 아니 삼십 분이었다면 장례식에서 들은, ‘디얼리 빌러비드(참으로 사랑하는)’라고 한 목사의 말(사실 목사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을 전부 아기의 묘비에 새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중요한 한마디만을 새겨 넣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비석들 사이에서 비문 새기는 사내와 그 짓을 하면서, 사내의 어린 아들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아주 오래된 분노와 함께 새롭게 눈뜬 욕망이 어려 있었다. 그 정도면 분명 충분했다. 또 다른 목사나 또 다른 노예제 폐지론자, 그리고 혐오로 가득 찬 마을 사람들에게도 대답이 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