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해 일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좌측벽면에 촘촘히 붙어있는 청동색 원을 배경으로 중지와 엄지를 서로 맞닿게 한 대형 손 조각이 몇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여기가 인도가 맞긴 하구나. 나는 졸린 눈을 게슴츠레 뜨며 생각했다. 공항을 나서니 아직 어두운 새벽이지만 도로변에는 차가 줄지어 정차해 있고 차 주변에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있다. 검은 피부의 남자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여지는 것이 느껴진다. 동양여자가 아기 띠로 갓난아기를 앞으로 메고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니까 그랬을까. 아니면 새벽에 도착한 나를 잠재적 손님으로 생각하고 그랬을까. 나는 첫째의 손을 더욱 꽉 쥐고 내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3개 있었다. 아파트 로비를 지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엘리베이터가 나란히 두 개 있었고 맞은편에 사이즈가 조금 큰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맞은편의 엘리베이터는 화물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입주민이 아닌 메이드나 청소부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만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함께 살면서 집안일을 도와주었던 ‘네팔인 니사’에게 들었다. 아파트 입주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다가 들키면 아파트 관리인에게 혼이 난다고 했다. 입주 도우미로 보이는 여자들이 내 눈치를 보며 엘리베이터를 탔던 이유를 그때 알게 되었다.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양산도 모자도 없이 발가락 사이에 끼워진 조리를 끌며 먼지를 일으키며 걷는 인도 사람들을 시원한 차 안에서 무심히 보았던 기억이 난다. 첫째 아이를 등교시키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도로를 면한 곳에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것을 매일같이 보았다.
토니 모리슨의 ‘타인의 기원’은 인종차별을 ‘타인’의 개념으로 그 기원을 더듬어본 글이다. 인간은 ‘우리’와 구분 짓는 ‘타인’을 만들어서 ‘우리’의 개념을 더욱 확고히 했고 백인이 흑인을 ‘타자’ 지정하면서 노예를 전혀 다른 종으로 취급하고 야만적인 제도와 비인간적인 태도를 정당화했다.
‘타자’ 그리고 ‘이방인’을 강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은 ‘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타자’와 ‘이방인’에게서 찾는다는 것과 다름없다.
인도에서 나는 나를 ‘마담’이라고 부르는 그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했던가. 나 스스로가 ‘외국인’이 되어 그들과 다른 ‘타자’로서 살지는 않았는가. 어디를 가나 나를 향해, 나의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그들은 나를 어떤 ‘타자’로 인식했을까.
토니 모리슨의 ‘타인의 기원’ 중에서
인종은 특정한 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는 인류라는 종에 속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다 무엇인가? 적개심은 무엇이며, 사회적 인종차별은 무엇이고, 게다가 타자화란 대체 무엇인가? 타자화가 가진 매력, 그것이 주는 위안과 사회적, 심리적, 경제적 권련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소속감을―‘나’라는 개별적 자아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그래서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암묵적인 의미를―느끼는 데서 오는 짜릿함일까?
(중략)
이방인은 바깥의 존재도 아니고 임의로 존재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억된 존재이다. 굳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그런 존재가 내 자아와 우연히 만났을 때 바로 경계심이 물결치듯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이 불러일으키는 모습과 감정, 특히 그 감정이 아주 심오할 때 비로소 거부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타자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타자의 마음을 빼앗아 나 자신의 거울 속으로 도로 데리고 들어오고 싶어 한다. 어떤 경우에든―경계심을 갖든, 헛된 존경심을 느끼든―인간은 타자에게 개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 자신은 꼭 지녀야 한다고 고집하는 그 개인적 특성을 남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