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직장 상사분은 퇴직 후 새로운 삶을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 그 모습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같이 묻어 나온다. 시아버님 역시 최근에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시고 명예퇴직을 하셨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출근하시기 시작했다. 환갑이 다 되신 분들이다. '인턴'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 인턴은 은퇴 후에도 열정과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긴 인생은 여전히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과 불확실성의 연속이고 시대가 변하면서 '행복'의 의미와 역할도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다.
이제 퇴직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예전처럼 명확하지 않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100세 시대에 접어들었고(현재 40대 이하는 130세까지 수명이 늘어난다고 한다.) 영국의 글로벌 헬스케어 싱크탱크 Nuffield Trust에 따르면 의료기술의 발전과 삶의 질 개선으로 80세 이상의 인구가 205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3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길어진 수명이 꼭 축복만은 아니다.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역할을 지속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늦은 나이까지 일해야 하고, 이는 새로운 형태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낳는다. 그렇다면 이 길어진 인생에서 행복하고 활기차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 참석한 "김경일 교수의 행복과 회복탄력성 강연"에서 이 질문에 대한 놀라운 답을 발견했다. "여러분,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목표? 결과? 아닙니다. 행복은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에서도 비슷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극한의 훈련을 견뎌낸 사람들, 심지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은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행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을 지탱하는 무기로 활용했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그녀의 삶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성취와 깨달음에서 행복을 찾아냈고 그것으로 불가능할 것만 같던 상황을 극복했다. 이순신 장군 또한 전란 속에서 난중일기를 써 내려가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의 기록은 단순한 전술 보고가 아니라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자기 위로와 다짐의 도구였다. 이처럼 행복은 고난을 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고난을 뚫고 나가는 무기가 된다.
우리는 종종 큰 행복만을 좇는다. 성공적인 경력, 안정된 가정, 원대한 목표를 이루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가 중요하다. 큰 행복은 인생에서 몇 번 찾아오기 어렵지만 작은 행복은 일상의 곳곳에 숨어 있다.
큰 성공이나 획기적인 사건보다 일상의 작은 기쁨들이 우리의 행복도를 더 많이 좌우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휴게시간에 잠시 들르는 회사 도서관이 작은 행복의 원천이다. 책장 사이를 거닐며 새 책 냄새를 맡고 가끔 발견하는 보물 같은 책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준다.
이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록이고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행복을 기록함으로써 망각되지 않게 하고 그 기록된 행복을 다시 읽으며 현재의 시련을 이겨내는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 하루하루의 사소한 성취, 따뜻한 대화 한마디, 기대하지 못한 작은 기쁨들. 이러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면 그것이 결국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단순한 기록을 넘어 그것을 현재의 힘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그 추억으로 산다."는 말을 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모두 힘들 때마다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돌아보며 힘을 얻을 수 있는 추억이 있다. 마치 배터리를 충전하듯이 기록된 행복은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재충전해주는 도구가 된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자기 통제와 경쟁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압박감 속에서도 나만의 행복을 찾아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얼마 전 퇴직을 앞둔 상사와 차를 마시며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20대 때는 성공이, 30-40대엔 안정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모든 순간에 행복이 있었더라고요. 다만 그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뿐." 그 말을 들으며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늘 미래의 어떤 순간, 더 나은 상황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나 역시 요즘은 매일 저녁 짧게나마 그날의 좋았던 순간들을 메모하고 있다. 어제는 창밖을 보며 마신 따뜻한 커피 한 잔, 오늘은 점심시간에 우연히 마주친 동료와 나눈 웃음 한 번. 처음에는 쓸 게 없어 몇 분이고 고민했지만 이제는 하루에도 수많은 행복한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라도" 행복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습관을 들여보자. 그리고 그것을 나만의 생존 도구로 만들어보자. 100세 시대, 긴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는 수많은 변화와 도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퇴직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되고 나이 듦은 두려움이 아닌 또 다른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건 거창한 행복이 아니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시선,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지혜다. 오늘도 누군가는 60대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70대에 새로운 꿈을 꾸며, 80대에도 여전히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은 단 하나, 행복은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의 생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퇴근길에 집으로 향하며 오늘 하루의 작은 행복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먼 미래에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그것이 바로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작지만 강력한 생존의 기술이니까.
참고
김경일의 인문학산책 "행복과 회복탄력성" 강연 중
행복의 기원(서은국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