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만소 Nov 07. 2022

[3] 만찬

벌써 자정이  되는 시간이었다. 알람이 필요하지 않게  것이 그녀를 만난 이후로 제일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일어나."

마지막 음절을 길게 늘어트리며 그녀를 깨웠다. 하품이 길게 나왔다. 그녀가 '블루탄'인지 '브루탄'인지 노르웨이의 왕을 만났던 이야기를 또 하기 전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서 차분한 재즈음악을 틀었다.

"음. 짐이 몹시 시장하구나."

그녀는 긴 몸을 지금보다 더 길쭉해지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방금 내린 눈처럼 하얀 피부에 다른 색은 일절 허락하지 않은 금발. 그와 대조되는 핏빛 눈동자는 긴 속눈썹 아래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이었다. 방금 일어나도 저런 형태를 유지할 수 있구나. 나는 밥상, 일단은 밥상이라고 부르지만 돼지의 피가 든 수혈팩을 파스타 먹을 때 쓰던 그릇 위에 올려두었다.

" 식사하시지요, 전하."

나는 만화에 나오는 집사처럼 흰 식탁보를 팔에 끼고 고개를 60도 숙여서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본인의 침대에서 일어나 내가 빼주는 의자에 고고하고 우아하게 앉았다.

" 근데, 전하. 한국에는 고작 60년 사셨으면서 왜 조선시대 왕이 하는 말을 쓰는 거야?"

내가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녀는 한쪽 눈으로 살짝 무례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 않고 다시 수혈팩을 쥐고 쭉 빨았다.

" 대충 이렇게 말해야 내가 나이가 많다는 걸 알 거 아냐."

갑자기 경박해진 말투였다.

" 그래도 요즘 그런 말 쓰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걸?"

나는 내 몫의 파스타면을 돌돌 말며 말했다. 그녀는 칫, 하는 소리와 함께 볼이 빵빵해졌다.

" 아, 피 묻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뺨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그녀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내 손가락을 깨물려고 입을 벌렸다.

" 아오! 툭하면 물라고 하지."

내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겨우 밀며 반항했다.

" 그치만, 네 피가 제일 맛있을 것 같단 말이야! 이거 맛없어!"

그녀가 고고하고 우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 가리지 좀 마. 내가 그거 얻어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눈치 보이는지 알아? 나보고 흡혈귀냬 참나."

내가 손에 묻은 피를 아까의 식탁보로 닦으며 말했다.

" 이미 명예 흡혈귀잖아."

그녀가 쿡쿡대며 웃었다.

" 내가 그래서, 요즘 세상에 흡혈귀가 어딨냐고 했지. 세상에 그런 흉측한 생물이 다 있냐면서. 빛도 못 보고, 마늘도 못 먹고."

그녀가 서글픈  동그란 고양이 눈이 되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얼굴보다 조금 아래, 은사슬로 만든 목줄이 번들거렸다. 흡혈귀란,  딱한 생물인  같다. 물어서 권속을 만들 정도로 속박에 얽매여 있는 생물. 자유가 되면 그만 미쳐버리는.



엽편을 쓰면 흡혈귀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써요. 이미 너무 많은 얘기들이 나왔고 많이 쓰인 이미지지만, 이것만큼 매력적인 게 별로 없더라고요.


그들이 계속 권속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다보니 이런 글이 나오게 되네요. 조금은 야시꾸리하지만 어딘가 귀여운, 그런 흡혈귀를 그려봤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2] 라면 가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