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자정이 다 되는 시간이었다. 알람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 그녀를 만난 이후로 제일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일어나."
마지막 음절을 길게 늘어트리며 그녀를 깨웠다. 하품이 길게 나왔다. 그녀가 '블루탄'인지 '브루탄'인지 노르웨이의 왕을 만났던 이야기를 또 하기 전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서 차분한 재즈음악을 틀었다.
"음. 짐이 몹시 시장하구나."
그녀는 긴 몸을 지금보다 더 길쭉해지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방금 내린 눈처럼 하얀 피부에 다른 색은 일절 허락하지 않은 금발. 그와 대조되는 핏빛 눈동자는 긴 속눈썹 아래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이었다. 방금 일어나도 저런 형태를 유지할 수 있구나. 나는 밥상, 일단은 밥상이라고 부르지만 돼지의 피가 든 수혈팩을 파스타 먹을 때 쓰던 그릇 위에 올려두었다.
" 식사하시지요, 전하."
나는 만화에 나오는 집사처럼 흰 식탁보를 팔에 끼고 고개를 60도 숙여서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본인의 침대에서 일어나 내가 빼주는 의자에 고고하고 우아하게 앉았다.
" 근데, 전하. 한국에는 고작 60년 사셨으면서 왜 조선시대 왕이 하는 말을 쓰는 거야?"
내가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녀는 한쪽 눈으로 살짝 무례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 않고 다시 수혈팩을 쥐고 쭉 빨았다.
" 대충 이렇게 말해야 내가 나이가 많다는 걸 알 거 아냐."
갑자기 경박해진 말투였다.
" 그래도 요즘 그런 말 쓰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걸?"
나는 내 몫의 파스타면을 돌돌 말며 말했다. 그녀는 칫, 하는 소리와 함께 볼이 빵빵해졌다.
" 아, 피 묻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뺨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그녀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내 손가락을 깨물려고 입을 벌렸다.
" 아오! 툭하면 물라고 하지."
내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겨우 밀며 반항했다.
" 그치만, 네 피가 제일 맛있을 것 같단 말이야! 이거 맛없어!"
그녀가 고고하고 우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 가리지 좀 마. 내가 그거 얻어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눈치 보이는지 알아? 나보고 흡혈귀냬 참나."
내가 손에 묻은 피를 아까의 식탁보로 닦으며 말했다.
" 이미 명예 흡혈귀잖아."
그녀가 쿡쿡대며 웃었다.
" 내가 그래서, 요즘 세상에 흡혈귀가 어딨냐고 했지. 세상에 그런 흉측한 생물이 다 있냐면서. 빛도 못 보고, 마늘도 못 먹고."
그녀가 서글픈 듯 동그란 고양이 눈이 되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얼굴보다 조금 아래, 은사슬로 만든 목줄이 번들거렸다. 흡혈귀란, 참 딱한 생물인 것 같다. 물어서 권속을 만들 정도로 속박에 얽매여 있는 생물. 자유가 되면 그만 미쳐버리는.
엽편을 쓰면 흡혈귀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써요. 이미 너무 많은 얘기들이 나왔고 많이 쓰인 이미지지만, 이것만큼 매력적인 게 별로 없더라고요.
그들이 계속 권속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다보니 이런 글이 나오게 되네요. 조금은 야시꾸리하지만 어딘가 귀여운, 그런 흡혈귀를 그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