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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훈 Dec 28. 2021

새로운 지식체계의 방향성

월러스틴의 <지식의 불확실성>을 중심으로 (essay)

  미국의 사회-역사학자로 알려진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론은 아주 명쾌하고 간명하게 세계를 하나의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몇 가지의 중요한 분석적 방법론과 전제들을 설정해야 했는데, 이러한 전제는 그의 이상적인 학문관과도 촘촘하게 엮여 있어 학문 체계의 방향성에 관한 뛰어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월러스틴의 <지식의 불확실성(2004)>을 바탕으로 학문적 체계가 거쳐온 역사와 그것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은 무엇인지 정리하기로 한다. 또, 자연과학대학의 학생으로서 이전의 과학적 사고에 관한 관념을 성찰하고, 월러스틴의 주장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의의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학문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우리 주변의 인식 대상들에 대해 합리적으로 바라봄을 통해, 그 내용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 때, 바람직한 세상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인간 사회, 인간과 자연의 공존, 행복한 개인의 삶 등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오늘날 학문이 구성되어 있는 형태가 학문으로 하여금 자신의 목적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전근대 시기에 유럽을 포함한 모든 문명은 공통된, 단일의 지식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지식이란, 무엇이 참이고(‘진’), 무엇이 선한 것이고(‘선’),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미’)를 아는 것이고, 세 가지를 아는 것은 하나이며, 이것이 문명을 구성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들에 의해 진, 선, 미가 분리되었다. 선한 것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과학이 태도를 달리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선’이 무엇인지는 밝혀내는 것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떠맡기고, 자신들은 ‘참’만을 추구할 뿐이고, ‘참’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진과 선은 분리되었고, 이것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분리되어 ‘두 문화’를 이루게 되고, 그 둘이 대립하게 되는 근대적 지식 체계의 바탕이 되었다. 철학은 인문학의 한 갈래로 축소되고, 인문학은 ‘선’과 ‘미’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강등되고, 오직 과학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뛰어난 학문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것이 오늘날의 수많은 학문의 ‘과학화’의 배경이 된다.

  여기서 거듭 반복 등장하는 과학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근대 과학, 즉 뉴턴을 근간으로 하는 과학이다. 뉴턴 과학이 가지는 특징을 몇 가지 정리해볼 수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결정주의’이다. 결정주의적 세계관은 뉴턴의 과학, 그리고 그것이 이룬 세계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었다. 뉴턴의 고전 역학에 의하면, 물체는 그 이전의 상태로부터 앞으로의 상태를 계산, 또는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체의 운동과 관련하여 에너지의 총량은 운동에너지와 퍼텐셜 에너지의 합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둘의 관계를 이용하면 물체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다. 이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기계적이고 선형적인 관계를 잘 보여주고, 이러한 관계는 근대 과학의 핵심인 선형성, 가역성, 평형을 잘 나타낸다. 또, 과학은 보편주의였다. 과학자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 진리는 자연계와 관련한 법칙으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주의 ‘진’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경험하고 관찰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학문의 과학화란, 해당 학문의 범주 내에서 관찰된 내용들을 법칙화하는 ‘법칙 적립적 학문’으로의 변모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때 사회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제도화를 이루었다. 이 시점은 이미 근대화로 인한 ‘두 문화’의 형성이 이루어진 이후였기 때문에 사회과학은 자연과학, 혹은 인문학의 방법 중 한 쪽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것이다. 월러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과학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는 두 마리 말에 묶인 사람 같았다. 자신의 인식론적 자세를 개발하지 못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거인이 벌이는 싸움에서 찢겼고, 두 거인은 중립적 태도를 용인하지 않았다.”
(월러스틴, 2007, p. 26)


즉, 사회과학, 자세히는 사회과학의 하위 분과 학문들(정치학, 경제학, 사회학)은 내적으로 방법론 투쟁을 거쳐야 했고, 결국 모두 법칙 정립적인, 즉 뉴턴 과학적인 방법을 택했다. 월러스틴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두 문화’ 사이에 낀 사회과학을 여러 방법으로 찢어놓았다고 분석한다. 그 첫 번째는 과거와 현재의 분리이다. 이것은 역사학과 나머지의 분리였다. 두 번째로는 서구문명사회와 나머지 세계의 분리였다. 마지막으로는 시장논리,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의 분리이다. 

  그 기원부터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학문의 분리는 결국 두 가지 지식 운동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된다. 그 중 첫째로는 인문학으로부터의 ‘문화연구’이다. 문화 연구는 ‘보편성’이란 명목 하에 만들어진 사회현실에 대한 주장이 사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통해 보편주의를 비판했다. 전통적으로, 인문학 연구는 보편적 가치의 내용을 담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보편적 가치’란 물론 선과 미의 영역에서의 보편적 가치인데, 문화 연구를 지지했던 연구자들은 이러한 방식을 비판했다. 보편적인 가치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이해하고 분석해야할 텐데, 텍스트 자체는 어떤 특수한 맥락에서 만들어져 특수한 맥락에서 읽히거나 평가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자연과학으로부터의 ‘복잡성 연구’이다. 복잡성 연구 역시 문화연구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문화연구가 사회 현상에서의 보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던 것들의 보편성을 부정한 것이라면, 복잡성 연구는 자연과학의 관찰 대상이 되는 자연 현상에서의 일반적 현상들이 사실은 아주 특수한 경우들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기존에는 모든 물체는 평형상태를 향해 다가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복잡성 연구에 의해 평형상태는 사실은 예외적인 현상이며, 물질 현상은 끊임없이 평형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주장했다. 즉 세상을 기계적으로 바라보던 뉴턴적 사고관인 단순계에 의문을 품고 복잡계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지식 운동은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데, 바로 과학과 철학의 분리와 대립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면서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개척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앞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상반되는 방법론 사이에서 방황하던 사회과학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사회과학의 분과 학문들은 방법론적으로 서로 양쪽으로 찢어진 상태로 각기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브로델은 두 가지 방법, 즉 자연과학적인 법칙 정립적 방법과 인문학적인, 해석학적 방법 모두 틀렸음을 주장하면서 사회과학의 통합을 시도했다.  

  월러스틴이 학문적 분석을 시행할 때 전제로 했던 중요한 방법론 중에는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통일이 있다. 과학과 철학의 분리와 대립의 산물로 역사학과 사회과학 역시 찢어진 상태였다. 전통적으로 역사학은 기술의 영역이었고, 인문학적인 해석의 영역이었다. 반면 사회과학은 물리학의 방식대로 관찰된 사회 현상을 법칙화, 일반화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월러스틴은 자신의 학문 구성 체계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러한 ‘역사적 사회과학’이라는 관점을 곤고히 했다. 사회과학의 관찰 대상인 사회적인 실재를 기술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사회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곧 상황의 특수성과 구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사회 구조가 끝없이 변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과학적이라는 것은, 법칙적인 것, 즉 장기 지속적인 구조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긴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못 박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성과 사화과학성에 대한 설명은 월러스틴이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다루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월러스틴은 분명 자본주의라는 세계 체계가 쉽게 무너지지 않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체계라고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는 500년 이상 그 구조를 유지하면서 놀라운 회복력과 탄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이루는 시스템을 설명하는 월러스틴의 방법은 분명 사회과학적인 면모를 가진다. 동시에, 월러스틴은 그 자본주의가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점에서 언젠간 종말을 맞이할 시스템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곧 자본주의 역시 실재의 특수성과 구체성에 의한 체제이고, 결국 변화할 것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바로 그러한 모순들로부터 다양한 투쟁들이 발생하여 변화가 일어나며, 바로 이렇게 인종, 민족, 성, 세대, 계급 사이의 다층적인 사회적 갈등들과 계급 투쟁들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이 자본주의적 세계 시스템의 기본적인 숙명이라고 지적하는 점으로부터도 월러스틴의 방법론적 일관성을 엿볼 수 있다. 결국, 그가 이런 방법론을 채택한 것은, 진선미가 통합된 이상적인 복합적 지식 체계에 대한 포부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 과정 중에는 분명 사회과학의 재통합도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은 명확하게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의 방법 중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융복합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아직까지도 자연과학도에게 가치중립적인 사실판단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고 그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고, 그렇게 하도록 기대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연과학 전공생은 대학의 커리큘럼에 따라 전공 지식에 열중하여 학계로 진출하여 연구직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진로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고, 이 때 과학적 지식에 몰두하지 않으면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자연과학 전공생들의 연구 동기 중에는 개인적 호기심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월러스틴의 주장을 토대로 자연과학 연구에 관해 성찰해보자면, 자연과학도가 무엇에 관해 연구할지, 어떤 기술의 개발에 힘쓸지는 개인의 관심, 또는 ‘진리에 관한 열정’ 등과 같은 것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현대 과학 연구에 있어서도 진선미가 고루 고려되어야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자의 연구는 분명히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 연구의 관찰 대상이 ‘자연’이고, 그 ‘자연’이 70억 인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가치판단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실제로 복잡성 연구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있어 많은 영향과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현대에는 자연과학에서의 가치 판단과 철학이 가지는 비중은 결코 무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필자가 가진 현대 과학에 대한 인상이다. 프리고진은 복잡계 열역학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등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 발견의 과정에는 수많은 철학적 논의가 이루어졌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다가오는 미래의 자연 과학 연구에 있어서 더욱 융복합적인 관심사와 탐구가 요구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월러스틴은 “지식구조들은 모든 역사적 사회체계를 문화적으로 떠받치는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뉴턴, 베이컨, 라플라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사유에 의해 세워진 근대성과 그것의 결과물로부터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식 구조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 구조의 근간이 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근대성의 부작용으로서 인간이 직면하는 많은 위기들, 예컨대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등의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는 밖으로는 다양한 정책들과 운동들이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활동들은 근본적으로 지식 및 학문체계의 산물이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앎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또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탐욕에 근거해 그것을 입맛대로 구겨놓아도 되는 걸까? 세상을 완벽히 이해하려는 오만함에 취해 눈을 반 쯤 가린 채 바라보아도 문제 없는 것일까?



Reference

 김환석. "과학 기술의 발전과 우리의 학문 체계." 지식의 지평 13 (2012): 154. Web.

Wallerstein, and 유희석. 지식의 불확실성 :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을 찾아서 /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 유희석 옮김. (2007). Print. 

 Heisenberg, and 김용준. 부분과 전체 / 하이젠베르크 [著] ; 金容駿 譯. (1982). Print.

 Wallerstein, and 유희석. 지식의 불확실성 :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을 찾아서 /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 유희석 옮김. (2007).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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