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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perlocal Oct 22. 2021

오로스코가 묻는 현대적 인류에 대하여

아이비리그 타운 이야기 - 하노버 3

서울도 비가 온 뒤 64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권 온도로 뚝 떨어졌다는데, 이곳도 비 온 뒤 가을바람이 매서워졌다. 집 창문 밖을 넘어보니 바람 때문에 낙엽비가 내리고 있다. 몇 주 전부터 딱따구리 새끼가 이 나무 저 나무를 넘나들며 열심히 나무를 파고 있다. 오늘도 굴을 다 만들지는 않고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험 삼아 뚫어보기만 한다. 아마 겨울이 오기 전에 혼자 연습을 하는 것 같다. 다 큰 딱따구리 한 쌍도 가끔 보이는 걸 보면 딱따구리 새끼는 엄마, 아빠와 같이 사나 보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오전 시간은 쥐 잡듯 후딱 지나갔다. 나이가 1년, 2년, 3년 들수록, 내 시간도 1의 1승, 2의 2승, 3의 3승으로 빨라져만 간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침마다 커피 한 잔을 하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만큼은 마치 낙엽이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천천히 내려오 듯 나의 시간도 중력에 몸을 실은 듯하다.  

 

아침 이슬로 축축해진 어느 가을 아침 산책길




아침 식사를 하고 오늘은 다트머스 컬리지의 중앙 도서관 격인 베이커-베리 도서관을 다녀오기로 했다. 내가 이곳에 가끔 가기 시작한 이유는 이곳에는 한국어로 쓰인 책이 많기 때문이다. 종종 가서 한 권씩 훑어보고 귀가하곤 한다. 


다트머스 컬리지 헌장에 따르면 컬리지는 원주민과 미국인의 교육을 위해 세워진 학교이다. 그러나 하노버 2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원주민보다는 영국인의 자녀들 (더 정확한 표현으로 하면 아들들이다. 다트머스 컬리지는 1972년부터 여학생을 받아들였다.)을 교육시키는 데 대부분 집중했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처참히 사라지고 잊혀졌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와 그들이 미국 역사에 기여한 바를 잊지 않기 위해 다트머스 컬리지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제13대 총장인 존 키메니는 다트머스 컬리지 헌장에 입각하여 원주민과 토착민을 연구하는 학과를 1970년에 설치했고 그 이후로 원주민의 입학을 더욱 장려하고 있다.   


사실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비교해볼 때 다트머스 컬리지의 백인 학생 비율은 현재 50%로 아직도 제일 높은 수준이다. 얼마 전 프로비던스를 잠깐 들릴 일이 있어 브라운 대학 캠퍼스를 둘러보았는데, 다트머스 컬리지와 비교하면 다양하고 리버럴한 분위기가 확 느껴졌다. 하지만, 다트머스 컬리지도 2009년 아이비리그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계 미국인 짐 용 킴 (Jim Yong Kim)을 총장으로 임명하는 등 나름대로 다양성을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이런 다트머스 컬리지의 베이커-베리 도서관에는 멕시코의 거장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José Clemente Orozco)가 1932-1934년에 걸쳐 완성한 '아메리카 문명의 서사 (The Epic of American Civilization)'라는 벽화가 있다. 


베이커-베리 도서관 내부


오로스코가 아메리카 문명에 관한 벽화를 완성할 미술가로 선정이 되었을 당시에 다트머스 컬리지는 그가 벽화를 그릴 때 정치적 표현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대공황 이후 공산주의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었고 오로스코가 멕시코인이었기 때문에, 소위 '보스턴 마더 (Boston Mothers)'라고 스스로 지칭했던 컬리지 학생들의 부모들은 오로스코가 이런 벽화를 그리는 것에 격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컬리지 총장은 '생각과 인종이 다른 예술가라는 이유로 작품을 파괴해야 한다면 루브르 박물관에 거의 모든 작품을 파괴해야 한다'며 오로스코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전시된 베이커-베리 도서관 오로스코 룸은 2013년 미국 역사지구 (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되었다. 도서관이 개방되어 있어 들어가 작품을 아주 조용히 -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므로 - 감상하고 나올 수도 있다. 


오로스코 벽화가 그려있는 오로스코 룸.  학생들의 공부방이기도 하다.


벽화는 아메리카 문명의 시작을 대부분의 미국인이 인지하고 있듯이 대영제국의 동부지역 식민화로 시작하지 않고, 메소아메리카 문명과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범으로 시작하고 있다. 먼저 서쪽 벽은 '케찰코아틀의 도착과 출발 (The Coming and Departure of Quetzalcoatl)'을 주제로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인간이 이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콜럼버스가 대륙을 재발견하기 전 아즈텍 문명의 골든에이지를 묘사한다. 


'케찰코아틀의 도착과 출발 (The Coming and Departure of Quetzalcoatl)'


동쪽 벽에는 '코르테스와 근대 시대 (Cortez and the Modern Era)'를 주제로, 케찰코아틀이 예언한 대로 16세기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가 나타나 아즈텍 문명을 파괴했다는 사실로 시작하여 20세기 기계의 대량생산, 독재자의 무력 행사, 민족주의/애국주의로 인한 사람들의 무의미한 희생, 그리고 이에 대한 종교의 무관심 등을 표현하고 있다.  


'코르테스와 근대 시대 (Cortez and the Modern Era)


서쪽 벽과 동쪽 벽 가운데 오로스코 룸 맨 끝쪽에는 '영혼의 현대적 이동 (Modern Migration of the Spirit)'이라는 단독 패널이 있는데, 아포칼립스적 분위기의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장면이다. 이 패널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해방과 영혼의 갱신을 과소평가하는 모든 이데올로기, 제도, 종교를 싹 쓸어버린다. 현대에 다시 부활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희생되는 운명을 거부하고 당시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폐해를 직접 파괴함으로써 과거의 무모한 역사를 치워버리고 있다.  


'현대 영혼이 이동 (Modern Migration of the Spirit)' (왼쪽 패널)


마지막으로 '산업화한 현대인 (Modern Industrial Man)' 패널에서는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모든 폐해를 쓸어버린 후 찾아오는 미래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벽화에 표현된 인간은 유럽인과 원주민이 섞여 있는 형상인데 혼자서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깨닫고 배우고 있다. 아마도 백인 문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융합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 같다. 


미래 인류는 이 두 시대 사이에서 일어난 비인간적인 역사를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했으므로 - 스스로 없애버린다. 자기 교육을 통해 과거 역사를 잘못됐었다고 인지하게 된 미래 인류는 스스로 방향성을 찾고 본연의 인간성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 아닐까 한다. 미래에는 노동자들이 기계가 보급되고 기술이 발전되는 위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해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산업화한 현대인 (The Industrial Man)' (이 부분은 학생들이 앞에서 토론하고 있어서 못찍었다. 사진 퍼옴)


벽화의 색감과 스토리텔링의 속도감 때문에 감상하는 내내 가슴이 벅찬 느낌을 받았다. 과거 인류가 저지른 무지한 잘못은 오랜 세월이 흘러 현대 인류에게는 역사와 지식이 되었다. 오로스코의 벽화는 그 역사와 지식을 담은 현재와 미래 인류의 재산이 되었다. 보스턴 마더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가해자의 입장만 담은 미국의 역사를 그린 벽화가 대신 그려졌더라면, 현대 인류의 지식은 지금보다도 더 얕고 좁은 것으로 남았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피해자의 역사가 담긴 예술품을 남기는 용기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뛰어넘어 가해자가 보낸 작은 회유의 제스처와 당당히 악수하는 용기, 이 두 용기가 만나 인류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간다.     



베이커-베리 도서관에는 '1902년 졸업생의 방 (Class of 1902)'이라는 곳도 찾아볼 수 있다. 1902년 졸업한 학생들이 기증한 가구가 배치되어 있다. 10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이 방에서 학생들이 1902년에 쓰였던 책상과 소파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1902년도 졸업생의 방



앞서 언급했던 한국어 책 코너는 희귀본 컬렉션을 보관하고 있는 러너 도서관 (Rauner Rare Book Collection Library) 입구 바로 앞에 있다. 태백산맥과 같은 장편 대하소설이나 한국의 유명한 단편 소설들, 한국의 역사, 남한과 북한 역사와 문학 관련 책도 많다. 조선족에 관련된 도서와 북한에서 출판된 책이나 선전용 책자도 찾아볼 수 있다. 


베이커-베리 도서관의 한국어 책 코너



[참고자료]

https://www.nps.gov/nr/travel/american_latino_heritage/the_epic_of_american_civilization_murals.html

https://hoodmuseum.dartmouth.edu/sites/hoodmuseum.prod/files/hoodmuseum/publications/2019_reprint_orozco_brochure_english_final.pdf

https://en.wikipedia.org/wiki/The_Epic_of_American_Civ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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