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리그 타운 이야기 - 하노버 5
근대 이후 근로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사건이 몇 번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들은 기존 문화가 고착되어 있는 인간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계기였고, 인간은 그 깨달음으로 인해 기존 문화를 붕괴 (distruption)시키고 새로운 문화를 다시 고착시킨다.
첫 번째 사건은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은 인간이 규모의 경제를 이해하게 된 사건으로, 이로써 농경 중심의 생산문화가 붕괴되고 대량 제조 산업 중심의 생산문화가 정착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사람들이 공장지대에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면서 도시가 발전하고 근로자들은 주 6일 하루 12시간을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근로 문화가 생성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노동자의 하루 근로시간을 8시간으로 법제화한 일이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열악한 근로문화 때문에 유럽과 미국에서 노동자들의 오랜 투쟁 끝에 1800년 대부터 하루 8시간 근로문화를 기업과 국가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국에 경우 시카고에서 처음으로 1866년에 8시간 노동시간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일리노이 주가 이를 법제화했다. 그 결과, 1937년 미국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된 공정 근로 기준법 (Fair Labor Stadards Act)이 통과되었다. 즉, 산업혁명이 가져온 열악한 근로문화가 붕괴되어 보통 사람들 (노동자들)이 공부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변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사회도 다양화되었다.
나는 세 번째 사건은 코로나19라고 믿고 있다. 하루 8시간 직장에서 일하는 문화는 100년이 넘게 바뀌지 않고 있지만, 사실 인간은 1990년대 IT 혁명 이후 근로 문화를 또 한 번 붕괴시킬만한 기술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를 계기로 사람들이 회사에 출근해서 주 5일을 근무하는 문화가 얼마나 필요하고 또 얼마나 불필요한지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터넷 혁명을 근로 문화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 코로나19를 계기로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많은 생명을 앗아간 코로나19가 하루 8시간 직장에서 일하는 근로 문화를 붕괴시키고 또 동시에 대도시의 발전을 붕괴시키고 도시와 비도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것 같지만 말이다.
다트머스 컬리지가 위치한 하노버는 뉴햄프셔주와 버몬트주 경계를 가르는 코네티컷 강 옆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주말에는 두 개 주의 경계를 넘나들며 주변 작은 마을을 구경하러 다니곤 한다. 하노버에서 차로 20분 정도 달리면 버몬트주 퀴치 (Quechee)라는 인구 300명의 아주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사이먼 피어스 (Simon Pearce) 글라스웨어 플래그쉽 스토어가 있다. 본사는 스토어에서 가까운 버몬트 주 윈저 (Windsor)에 자리하고 있다. 사이먼 피어스는 유리 공예 기업인데, 미국 정부부처에 독점으로 유리 공예를 납품하고 있다고 한다.
기업 창립자인 사이먼 피어스는 1946년 영국에서 태어난 아일랜드인으로, 킬케니 맥주를 양조하는 곳인
아일랜드 킬케니 (Kilkenny)에서 도자기 공예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도자기 공예를 배웠다고 한다. 그 후 유리공예에 매력을 느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유리공예를 터득했다. 1981년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이곳 버몬트 주에 사이먼 피어스 유리공예 기업을 세웠다.
19세기부터 아우타퀴치 (Ottauquechee) 강 주변을 따라 공장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퀴치에는 창고, 공장, 건물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 중 건물 몇 개를 사이먼 피어스가 매입하고 플래그쉽 스토어 이외에도 테이스팅 룸 등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에 사이먼 피어스는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트머스 컬리지에서 지리학 학부와 턱 비즈니스 스쿨 (MBA)을 졸업하고 25년 간 뉴햄프셔 주 레바논에서 지리 (地理) 데이터 기술 관련 일을 하다가 사이먼 피어스에 입사한 제이 벤슨 (Jay Benson)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었다. 창립자 신분으로 사이먼 피어스는 제이 벤슨과 함께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사이먼 피어스 상품과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마을을 홍보한다거나 오래된 역사 건물을 보존하고 보수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등 지역 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나는 코로나 이후 시대에는 하노버 4편의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나 사이먼 피어스 같이 대도시가 아닌 한적한 비수도권에 본사를 두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일이 점점 많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오랫동안 출판사에 근무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는데, 그 친구는 다시 코로나 이전 시절로 돌아가 왕복 2시간 통근을 하며 주 5일 근무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아무래도 재택근무를 영원히 근로문화로 정착시키거나 아니면 한적한 비도시로 기업을 옮기는 방법, 아니면 이 두 가지 방법을 혼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시대가 온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긴 전 다녔던 직장은 약간 특이하게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이 1/3씩 섞여 함께 일하는 한중일 3국 정부가 함께 설립한 곳이다. 기관의 수장도 2년에 한 번씩 3국이 돌아가며 맡았었는데, 코로나 시기 때에는 일본인이 기관장을 맡고 있었다. 기관이 한국 서울에 있었기에 한국법을 기반으로 행정이 이루어졌으니 코로나 시기에는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였다. 그런데 일본 기관장은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고 재택근무를 하는 것을 집에서 쉬는 '휴가'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몇몇 파견된 일본 직원들에게는 가급적 직장에서 일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직접 경험한 나로서는 재택근무 환경을 재빨리 조성하고 있는 삼성이나 SK 같은 대기업을 제외하고 (중국이나 일본 대기업이 이 준비를 하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겠다만) 동아시아 국가들이 재택근무 근로문화를 영원히 정착시킬 수 있을지 아직까지는 의문이 든다.
아무튼 다시 사이먼 피어스 플래그쉽 스토어 이야기로 돌아가서, 2013년 다큐멘터리 더 크래쉬 릴 (The Crash Reel)의 주인공인 스노보더이자 기업가 케빈 피어스가 사이먼 피어스의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가족과 함께 하는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기업의 모토로 매장도 따뜻하게 꾸며져 있다.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직영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
우리도 이날 점심식사를 위해 이곳에 방문했는데, 점심 식사 전 1층 매장을 쭉 둘러봤다. 사이먼 피어스의 모든 글라스웨어는 아직까지 100% 수작업으로만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진열된 유리컵도 조금씩 모양이 달라 보였다. 기계 생산의 말끔함과 현대적인 깔끔함을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눈으로 볼 때 약간 둔탁(?) 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계속 볼수록 장인 정신과 클래식함이 묻어났고 질리지 않는 심플함이 고급스러웠다. 글라스웨어 하나하나가 매우 고가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방문해 크리스마스와 새해 선물을 구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 정부기관에 유리아트를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다는 기업이 인구가 300명인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 모든 유리 데코레이션 상품들이 전부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그 장인정신이 대단하고, 또 이런 '슬로우'한 판매 사이클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경영 노하우도 배울만하다.
레스토랑 음식은 버몬트 주에서 생산하는 유기농 재료를 공급받아 만들어진다. 우리는 버몬트 체다 수프, 셰퍼드 파이, 양고기 햄버거를 주문했다. 식전 빵에 곁들인 버몬트 농장에서 생산한 휘핑 버터의 맛은 잊을 수 없이 고소했고, 지역 농장에서 기른 신선한 샐러드도 신선했다. 미국 음식은 전반적으로 짜지만 이곳 음식은 짜지도 않고 맛 좋은 건강음식을 먹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 주변 경관이 또 장관이라 식후 산책 겸 한 바퀴 둘러보았다. 레스토랑 바로 옆에 목조 다리가 있는데, 이곳은 아우타퀴치 트래킹 코스의 시작점이다. 가을 단풍과 눈으로 덮인 겨울 산이 유명한 버몬트 주에서도 특히 유명한 곳이라고 하니, 나중에 코스를 한번 밟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조 다리 아래로 유유히 강이 흐르고 강에서 떨어지는 작은 폭포도 운치가 있었다.
이렇게 점심식사를 하러 왔다가, 미국 글라스웨어의 최고 자리에 있는 기업도 알게 되었고, 퀴치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재료도 맛볼 수 있었다. 또, 퀴치의 역사와 관광 트레일도 알게 되었다. 코로나 이후 한적한 곳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나서 방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퀴치와 윈저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한적한 삶이 상상되기도 했다. 오늘은 이곳을 방문한 나를 포함한 소수만 이를 경험하고 배우게 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토리와 역사가 더 쌓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이 지역은 더 유명해지고 지속 가능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https://www.trailfinder.info/trails/trail/ottauquechee-trail
https://www.hartford-vt.org/DocumentCenter/View/271/HDBrochureQuechee?bid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