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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Apr 11. 2024

[86호][여성] 두근두근! 다가가기 프로젝트

부편집장 조은결


 오늘도 한 걸음 더?

 떨리는 마음으로 새 학기를 맞았다. 볕이 찬란한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특별히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자를 부르는 동아리 모집 포스터며, 교내 소모임 홍보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래도 여대라 그런가? 곳곳에서 여성 인권을 이야기한다. 나도 페미니즘에 관심은 있지만 다들 무서운 사람이면 어떡하지? 페미니즘의 물결들은 뭐람? 보부아르, 버틀러, 해러웨이, 브라이도티···. 가뜩이나 어려운 이론들인데 외국의 학자라니, 혼자 붙잡고 있기엔 막막하다. 나는 언제쯤 척척박사가 될 수 있지?

↑ 위 내용이 본인의 얘기 같다면 본 기사를 주목하세요! 


 그래서 근맥이 준비했습니다.

 추천 페미니즘 도서! #내돈내산 #완독 #오독완


 여성학과 평화학 연구가 정희진의 책 두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희진은 ‘아내 폭력’이 은폐되고 생산되는 실상을 드러낸 『아주 친밀한 폭력』, 성찰적 독서를 기록한 『정희진처럼 읽기』의 저자로, 이외에도 여러 책을 쓰고 편집했다.


 페미니즘의 도전

『페미니즘의 도전』은 2005년에 출간된 이후, 페미니즘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에서 ‘논쟁이 되는 책’이었다. 국내 저자의 여성학 저서라는 점에서 판매율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15년간 스테디셀러로 자리하며 명성을 굳혔다. 이는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 지식에 목말라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종종 지배 권력이 생산하는 ‘상식’으로는 원인을 파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을 마주친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한다거나, 명백한 페미사이드1)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판단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엔 다르겠지, 라는 마음으로 기대와 좌절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만 남는다. 이때 여성주의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며 ‘보편’으로 통용되는 그들의 논리를 전복한다. 날카로운 시선을 견지하는 일은 그 자체로 힘들고 지치는 여정이다.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2) 저자의 말처럼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거나 편안한 상태로 이끌지 않는다. ‘상식’으로 통용되는 지배 규범을 일깨우고 도전하는 새로운 언어는 세상과 유리된 불편함을 선사할 것이다.

 아직 여성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세계의 비밀을 하나하나 파헤쳐 볼 마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1판 1쇄 발행 이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페미니즘의 교과서’로 숱하게 언급될 정도이니 말이다. 사회에 통용되던 정의에 반하는 각기의 페미니즘‘들’이 등장하며 연대를 촉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나, 이런 때야말로 “지속적인 모색이고, 사유이며, 자기 변화”3)인 ‘도전’에 도전하기 적절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혹 이미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했다면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를 떠올려 보자.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촘촘히 얽힌 구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자. 그러니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어쩌면 당연할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며 삶의 방식을 고민했던 순간들. 고통스러웠지만 환희에 들끓었던 기억이다. 이처럼 희열을 동반한 이물감은 분명 불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통은 삶의 조건이 아니라 삶의 방식”4)임을 다시금 확인하듯 말이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페미니즘의 도전』이 여성주의를 설명하고 소개하는 책으로 꾸준히 읽힐 무렵 또 한 권의 책이 신년 선물처럼 등장했다. 지난 2023년 11월 출판된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은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을 짚어 본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변화해 온 여성주의, 특히 정체성 담론을 분석한다. 개인을 보호하는 공동체가 부재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각자도생을 강령으로 삼고, 생존을 위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다. 이때 적극적으로 자원화되는 것이 몸이다. 젠더 정체성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핵심 요소로 작동하며 이전과 다른 섹슈얼리티 실천으로 연결된다. 억압의 원인이었던 여성성이 현재는 일부 여성에게 자원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5)

 이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에 비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이슈가 맥락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주의가 오로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공적 의제라는 점에서, 한국의 젠더 문제를 직접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공동체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하려면 다양하고 단단한 생각의 토대가 필요하다. 도발적인 문제 제기로서 “한국이라는 로컬의 섹슈얼리티 ‘현실, 문화, 담론’”6)을 다루며 “변화하는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7)인 이 책과 함께 사유해 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몸에도 ‘남성 사회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자리 잡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새로운 언어와 함께 더욱 긴밀하게 연결될지도 모른다.


“이 책이 쉽게 읽히지 않는, 논쟁의 불씨가 되는 텍스트이기를 바란다. 여성학, 여성 운동은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경합을 통한 생산적인 갈등 없이는 진전도 없다. 한국의 여성주의가 나아감 없이 여성의 생존의 목소리가 왜곡되어 미소지니8) 의 타깃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여성의 공부, 다른 언어, 남성 사회가 못 알아듣는 언어가 최고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사회의 질문에 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자.”9)    


 후퇴는 전진을 위한 것!

 좋은 책이고 대단한 저자인 건 알겠어. 그렇지만 텍스트는 너무 딱딱해! 전문 용어로 무장된 이론 앞에서는 뼈도 못 추리는걸. 잠깐, 그러고 보니 덕성여대에 입학했다면 꼭 들어 봐야 하는 수업이 있다던데? 바로 김주희 교수님의 여성학 강의! 그렇지만 교양 수업 정원은 터무니없이 적고, 내 손은 너무 느린걸. 아무리 멋지셔도 항상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이번에도 근맥이 마련했다. 궁금증 해소를 위한 김주희 교수님과의 시간!


조은결 | 안녕하세요, 교수님. 현재 여성학 전공자로서 ‘몸의역사’, ‘여성과노동’, ‘여성과현대사회’ 등 여러 교양 수업을 맡고 계시죠. 이번에 좋은 기회로 교수님과 인터뷰하게 되었어요. 처음 제안했을 때 흔쾌히 응해 주셨는데, 혹시 이유가 있을까요?


김주희 교수 | 2021년에 덕성여대라는 낯선 환경에 와서 교지를 가장 먼저 만났어요. 개강 전, 그러니까 학생들을 직접 만나기 전에 이미 교지를 통해 학생들을 만난 거예요. 수업에 들어온 교지부 친구가 인터뷰를 요청하니 너무 기쁘고 반갑고, 마다할 일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죠.


조은결 | 감사합니다. 사실 조금 걱정했거든요. 덕성의 슈퍼스타셔서···. 재학생들이 올리는 강의 추천 목록에 교수님 수업은 꼭 있는 것 같아요. ‘덕성여대 입학했으면 꼭 들어 봐야 한다’라고 명성이 자자하더라고요. 저도 딱 하나 들었지만 너무 좋았어요.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강단에 서 계신다는 것도 많이 느꼈고요. 그런 애정의 원천이 궁금해요.


김주희 교수 | 저는 교실에서 가장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그래서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면 20년 전 내 모습 같고, 그 학생들이 곧 나라고 생각하게 돼요. 처음 대학 교육을 받았을 때 느낀 놀라움도 여전히 중요한 자원이고요. 아, 대학에서는 이런 교육을 받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구나. 스펙을 쌓아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이 아니라,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을 뒤집으면서 질문하고 사회를 새롭게 보고 일상을 해석하는 힘을 키우는 곳이구나. 어른이 되니까 알겠더라고요. 또 덕성여대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 알고자 하는 열망이 굉장히 구체적이에요. 관념적으로 ‘이런 걸 좀 알려주세요’의 태도보다 ‘이런 질문을 해결하려 수업에 들어왔다’라고 말해 주는 구체성인 거죠. 실질적인 지식과 앎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걸 느끼니까 내가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업을 잘 만드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구나, 생각해요. 새로운 걸 알게 됐을 때 다음 수업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할지 설레는 마음이 있잖아요. 나와는 조금 멀리 있는 것 같은 이슈가 현실의 나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 때 내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 그걸 나도 경험했으니까 교실에서 책임감 있게,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는 걸 항상 떠올려요. 그런 것들이 학생들에게 전해지고 또 추천도 해 준다니 너무 감사한 일이네요.


조은결 | 그럼 이제 추천하셨던 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생긴 질문을 말씀드려 볼게요. 저자는 여성학 강의실에서 많은 학생이 정치적으로 각성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대학’은 굉장히 탈정치화된 공간이잖아요.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페미니즘 이론을 거시적인 사회 영역에 적용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스토리텔링에 더 치중해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여성학 강의실에 들어가는 우리에게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김주희 교수 | 벨 훅스도 여성학을 처음 배웠을 때 얘기를 인상적으로 하고 있죠. 여성학은 공터나 광장에서 민중들과 만나 지식을 생산하고 확장할 기회나 여건, 스승이 적어요. (그래서 차미리사 선생님이 선구적이기도 한 것이고요.) 기회는 대개 교실에서 열리죠. 이때 내가 누리고 있는 대학 교실이 특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할 것 같아요. 내 경험과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우리는 비슷한 모습으로 이 공간에 있지만, 그게 당연하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이곳에 놓인 상황이 있을 뿐이라는 거죠.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며 수업에 임한다면 다른 학생들의 말도 깊이 있게 들리지 않을까요? 그리고 내 경험을 설명하려는 태도도 괜찮아요. 이 지식이 내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오히려 더 가깝게 느낄 수도 있는 거고.


조은결 | 책의 내용대로라면 페미니즘은 여성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필수적인데요.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반남성주의’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요.


김주희 교수 | 페미니즘은 반남성주의라기보다는, 기존의 지식이 남성중심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굳이 반을 붙이자면) 반남성중심주의인 것 같아요. ‘기존의 세계를 부수는 개혁적인 시도가 싫다’는 사람들이 안티페미니스트인 거고요. 책에서도 말하듯이, 페미니즘 지식은 모두를 위한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고민이거든요. 여성들의 누락된 경험에서 출발하면 어떻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할지, 어떻게 평등한 세계를 만들지 생각할 수밖에 없고요. 이걸 안다면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죠. 남녀공학 수업 들어가면 남자들이 공부 모임 만들어서 세미나도 하고 그래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남성들도 있고요. 어쨌든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남성들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필요하죠. 공학도 여대처럼 더 다양한 수업을 개설한다면 그런 기회가 주어질 거예요.


조은결 | 그런데 책을 읽으며 조금 아쉽기도 했어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좋은 입문서인 건 알겠는데, 아무래도 미국이 배경이니까 쭉 한국에서만 살아온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특히 미국의 굵직한 사건이나 여러 영미문학을 언급할 때나 ‘페미니즘 영성’에 대해 얘기할 때요.) 이런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다른 책이나 방법이 있을까요?


김주희 교수 | 맞아요. 나도 그랬어. 처음 영미권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이 쓴 책들을 읽었는데 흥분되지만 묘하게 나와 다른 느낌. 그래서 다양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어요. 나랑 좀 더 가까운 걸 읽고 싶은 거죠. 그런데 영미권 책만이 아니라 태국, 동남아, 아프리카, 인도, 남미 각지의 페미니스트들이 쓴 책에서도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책에서 배우는 게 굉장히 달랐어요. 이 이질감조차도 단지 미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이질감과 또 다른 배움이 있다는 거죠. 다양한 이질성이 있다는 걸 알고, 나와 가까운 페미니즘 책을 읽고 싶다면 한국의 책을 열심히 읽고 이해하기. 이 둘의 균형을 잘 잡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정희진 선생님 책도 좋고, 이소진 씨의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젊은 책이에요. 이소진 씨도 학생들이랑 나이 차가 크지 않을 거라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고. 『전쟁 같은 맛』은 소설인데 멀지만 가까운 책이죠. 미국에서의 경험이 영어로 쓰였지만 한국의 흔적을 가지고 가니까.


조은결 | 그런데 교수님···. 페미니즘 도서도 그렇고 책이 너무 비싸요······.


김주희 교수 | 이해해요. 나도 대학생 때 돈 모아서 두꺼운 사회과학 책 사고 그랬거든요. 대책 마련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원해서 가졌을 때 큰 만족감을 주는 게 책이 아닐까 싶어요. 읽고 싶은 책을 사고, 밑줄 긋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중요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해 주고 싶네요. 학생들이 책에 흥미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면 일단 너무 바쁘지. 독서에 필요한 시·공간이 허락되지 않는 게 어려운 문제죠. 그래서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필요한 것 같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습관들이 조금 만들어져 있어서 항상 책을 끼고 다녀요. 누구 기다리면서, 회의 시작 전에 몇 장이라도 읽는다거나. 그런 문화가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좀 더 확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책을 구성하는 것 중 중요한 부분이 이 물체성. 만져지는 거예요. 책장을 넘기면서 나와 글이 대면하고, 메모지에 필기하면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생각하면서 찾아 읽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게 대학생 시기거든요. 또 한 권을 다 읽으려는 강박을 갖지 않아도 돼요. 어쩌면 읽는 것보다 기록을 남기고 쌓아 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책이든 만났을 때 이 책에 대한 정보, 의미, 중요한 문장, 책을 만난 시기와 이유처럼 도움이 된 것들을 써둔다면 그 책은 내 것이 되는 거거든.


조은결 | 참, 중간에 페미니즘이 학문화되면서 페미니즘의 영역이 제한됐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우리가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요. 왜 머리 붙잡아 가면서 시몬 드 보부아르 책과 주디스 버틀러 책을 읽어야 하는지···.


김주희 교수 | 아유, 보부아르, 버틀러 안 읽어도 돼. 중요한 건 ‘왜’ 페미니스트 지식을 알아야 하느냐, ‘왜’라는 질문이에요. 일단 내 경험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죠. 나의, 엄마의, 여성들의 경험은 기존의 지식 체계 안에서는 작은 이야기로 취급돼요. 역사 속에 훌륭하고 똑똑한 여성들은 늘 존재했지만, 한 명의 개별적인 천재로만 남아 있죠. 가문으로 계승되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거지. 이 지식이 상징적으로 축적되면 내 다음에 오는 여성은 다시 처음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니까 남성중심적 지식에 질문을 던지며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 여성주의 지식이 쌓이고 내가 그 계보 안으로 들어가서 후배들을 맞이하는 노력이 있어야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역사의식을 갖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조은결 | 아, 여성주의를 하려면 공부가 필수적인지에 관한 질문도 있었어요.


김주희 교수 | 이건 정말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것 같은데, 나도 내 경험에 기반해서 말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나는 교실에서 배운 사람이고 교실이 굉장히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교지 인터뷰 중이고, 우리 학생들이 보는 게 이 교지인 거잖아요. 그럼 학생들한테는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공부해야 한다고. 왜냐? 대학이 공부하는 곳이니까. 굉장히 맥락적인 답변이에요. 이런 환경에 놓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고. 대학은 배우는 곳이거든, 진짜 이 머리를 깨는 곳. 너무 좋은 기회가 있는데 굳이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하는지 질문한다면 난 해야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켜켜이 쌓아 올린 지식의 역사이기도 해요. ‘그 지식 몰라도 돼’, ‘페미니즘은 내 의지만으로 돼’라고 말하는 건 이 계보를 다시 무너뜨리는 일이야. 페미니스트들이 이미 한 논쟁과 역사를 통해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건데, 매번 싸운다면 어떤 면에서는 안타까운 면이 있는 거지.


 후퇴가 있어야 전진도 있는 법!

 공부는 어렵다. 독서도 어렵다. 운동도 어렵다. 단단했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이야기들은 새롭고 신기하지만, 어느새 손에 잡힐 듯 말 듯 날아가고 만다. 세상엔 참 쉬운 게 하나 없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고 찬물을 급히 먹으려면 체하는 법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다음 숟가락을 뜨도록 함께 식사하는, 차가워진 내 손을 주물러 주는 동지가 아닐까? 지식을 쌓고 이론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 그러나 우리의 운동은 혼자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노래하는 일이 참 중요하다. 고되고 지친 날이 찾아올 때 내 옆의 누군가가 앞으로의 원동력이 되어 줄 테니까.  


 인터뷰에 응해 주신 김주희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1) 페미사이드(femicide)는 젠더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2) 정희진. (2005). 페미니즘의 도전. 서울:교양인, 31쪽.

3) 위의 책, 13쪽.

4) 페미니즘 사상가 글로리아 안살두아(Gloria Anzaldúa)의 말을 인용한 『페미니즘의 도전』의 문구를 재인용했다.

5) 정희진. (2023).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서울: 교양인, 9쪽.

6) 위의 책, 14쪽.

7) 위의 책, 12쪽.

8) 미소지니(misogyny)의 직역은 여성혐오로, 한국에 ‘여성혐오’가 알려진 것은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의 『일본의 미소지니』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로 번역되면서다. 그러나 정희진은 사회마다 성차별의 작동 방식과 가부장제의 성격, 여성의 의미가 다르기에 번역 시 한국에서의 맥락을 고려해야 했다며 이것이 오역이라고 말한다. 미소지니의 적절한 대응으는 ‘남존여비’를 제시하기도 했다. (정희진. 「[정희진의 어떤 메모] 미소지니=여성혐오?」. 『한겨레』. 2017.08.04.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05605.html(2024.01.29. 접속).)

9) 위의 책, 20쪽.



참고문헌

정희진. (2005). 페미니즘의 도전. 서울:교양인.

정희진. (2023).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서울: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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