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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Apr 18. 2024

[86호][여성] 여자 중독

부편집장 조은결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허구입니다.  

 

 세상은 여자에 중독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여자로 결부된다. 그 어떤 일에도 여자가 빠지지 않는다. 여자가 없으면 어떤 일도 이뤄낼 수 없으니까. 세상은 여자를 이렇게나 사랑하지만, 여자의 본질을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잠시만, 미안하다. 내가 무언가 착각한 것 같다. 혼란을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본질이라니? 여자에게? 여자들에게 허락된 것이란 불타는 사랑으로 고통받는 마음, 질투심에 빛나는 아름다운 녹색 눈, 길게 늘어뜨린 결 좋은 머리카락, 우울하고 고달픈 심신을 달래 주는 풍만한 젖가슴, 다가가면 좋은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살갗뿐이다. 본디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나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스스로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리라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의 본질이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존 ‘아담’ 스미스, 여자들을 사랑한다. 그것도 정말 많이. 


 여자에 중독된 사회

 전광판에는 언제나 여자가 등장한다. 발랄한 음악과 함께 상기된 얼굴로 탄산음료를 내미는 이도, 옅은 화장을 하고 주류를 들고 있는 이도 모두 여자다. 어디 청순하기만 할까, 야릇한 표정을 짓고 농밀한 동작으로 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추는 이 역시 모두 여자다. 분홍빛, 새빨간, 검은색의 립스틱을 바르는 것 역시 여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여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것을 관찰하고 탐미하고 퍼뜨린다. 누군가의 관심에 의존해야만 하는 여자들을, 정주하지 못하고 붕 떠다녀야만 하는 그들을 구경할 뿐이다


 그날을 떠올리면 뱃속에서 심장이 쿵쿵거린다. 겨우 주먹만 한 장기가 온 힘을 다해 전신으로 피를 뿜는 모양이 그려진다. 아, 또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진눈깨비가 내린다. 한 달에 한 번 허락되는 외출을 감행한 날인데 하필이면. 오늘처럼 날씨가 좋지 않아도 길거리는 여자들로 꽉 차 있다. 굽 높은 하이힐은 발목부터 종아리,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을 보여준다. 굴곡진 몸을 드러내는 옷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대화하거나 닿지 않아도 옆에만 있으면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다. 참 무서운 일이다. 당장 어제 저녁에 아담을 서른세 번 찌른 여자가 뉴스에 나왔는데도 여자들에게 사로잡힌다니. 날카로운 무기를 들었던 그녀도 저런 얼굴을, 저런 냄새를, 저런 목소리를 가졌을 것이다. 기관 안에서는 그녀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가십에서 벗어나고 싶어 외출한 주제에, 여자들이 주는 자극에 목적을 잊어버린다면 뭐가 다른 거지. 괜히 고개를 숙인다. 축축하게 젖은 도로는 밤이 되면 얼어붙을 것이다. 낮게 뱉은 한숨은 입김으로 변해 흩어졌다. ‘아담’처럼 우산을 들어 주는 여자 없이 바깥에 나온 아담은 쉬운 표적이 될 것이다. (최소한 기관의 관리자는 교육 시간마다 아담들에게 줄곧 그렇게 말해 왔다.)


 “어디 가, 아담?”

 “룸메이트한테 줄 이를 사려고요. 송곳니.”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아뿔싸, 질문에 무심코 대답하고 말았다. 어떤 제안이든 거절할 심산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녀가 웃으며 걸음을 맞추자 연둣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저 미소는 가짜다. 알지만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담은 그녀들의 요구에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답변을 마치고도 쓸데없이 구체적인 정보를 덧붙인 데에서 드러났다. 이런 순간마다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기분이었다.


 “내 걸 가져가는 건 어때?”

 “하지만·····.”

 “진짜를 보여줄게. 물론 만지는 건 안 되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동행인의 존재에는 개의치 않고 내내 앞만 보던 ‘아담’이 놀란 얼굴을 할 만큼. 돌아보자, 그녀는 얼굴을 가린 막을 벗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가게에서는 홀로그램만 지겹게 띄워 두잖아. 이상했다. 그녀의 ‘진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흥미를 끌었다.

 *

 주머니 속에 손을 넣으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송곳니는 다른 것들보다 조금 길고 더 날카로웠다. 손안에서 그걸 굴리며 세상엔 이렇게 생긴 송곳니가 세 개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이걸 꼭 룸메이트만의 선물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여자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여자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 여자가 없는 집은 집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여자가 만들어 준 음식만이 음식으로 인정받았고 여성이 다려준 셔츠만이 셔츠로서 의미 있었다. 아침에 마실 커피도, 매일 메는 가방도, 하얀 이도, 여자가 있어야 의미가 생겼다. 또한 여성에게 사랑받지 않은 인간은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여성의 사랑을 구매했다. 여성이 사준 셔츠, 여성이 싸준 도시락, 여성의 손톱, 머리카락 등 여성이 묻어난 모든 것은 상품이 되었다.

 여자의 송곳니를 룸메이트에게 바로 전달한 건 아니었다. 과시가 아니라면 쓸모조차 없는 물건인데도 그냥 아껴 두고 싶었다, 잠시라도 손길이 닿는 곳에 두고 싶었다. 처음으로 쥐어 본 순간처럼 손안에 가둬 보면 생생하게 진동하는 그때의 느낌. 시야가 핑 돌고 머리가 울리는 걸 단순한 쾌감으로 치부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트라우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며칠 전, 변변한 포장도 없이 불쑥 전해 주었는데도 룸메이트는 아주 감격한 것 같았다. 받은 걸 돌려주고 싶었는지 나를 몇 번 챙겨 주기도 했다. 보답이랍시고 타 준 핫초코가 유난히 달게 느껴졌다. 평소에 너무 인색하게 굴었나. 아무쪼록 바뀐 태도가 썩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건 아담의 일이 아니었고, 그에게는 대신 보호인이 있었으니까.

 모든 아담은 원한다면 보호인을 가질 수 있다. 이 주 전의 외출은 감정적 충격을 남겼기에 ‘아담’ 역시도 이제는 보호인을 두게 되었다. 물론 가장 좋은 등급은 아니었지만. ‘아담’이 바라는 건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 주고 그의 비밀을 침묵할 기능뿐이었다. 어느샌가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급히 보호인을 호출한다. ‘아담’은 빠르게 달려온 보호인의 손, 차가운 금속성의 그것을 억세게 붙잡는다. 도망쳐야 한다.


 “그 여자가 전부를 드러냈어. 전부.”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죽인다. 보호인은 새까만 눈동자로 그런 ‘아담’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아담’의 지시 전까지 징후를 살피는 것이다. 그의 매끄럽지 않은 눈깜빡임은 짤깍이는 소리를 낸다. 


 “벌거벗었어······.” 


 선물을 사러 갔던 날, 돌아오는 길에 지나온 중심지에서 맞닥트린 일이었다. 한 여자가 인파가 몰리는 길목에 서더니 그 자리에서 자기의 ‘진짜’ 모습을 몽땅 내보인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감싼 막을 떼어내고 나신이 된 그녀는 무어라 외쳤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거리에 몇 안 되는 아담들의 존재를 확인한 후 울부짖었으니, 아마 ‘아담’도 그녀의 계획 속 청자였을 테다. 기대에 부응하진 못했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졌다. 스스로를 그렇게 훼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완벽한 ‘막’에 덮여 있지 않은 누군가의 모습도. ‘아담’은 영문도 모르고 그녀에게로 달려갔으나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막을 다시 입혀 주어야 하나? 하지만 손을 대도 괜찮을까? 이것을 벗어던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애초에 우리는 닿아도 괜찮은 존재들일까? 시신경이 망막과 뇌를 연결한다. 익숙했던 거리의 풍경은 낯선 스트레스로 치환되어 신체를 각성 상태로 이끈다. 그 광경이 기억 깊숙한 곳에 새겨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아담과 충격을 공유할 수는 없었다. 아담은 세계의 축이 되는 존재로서 옳고 아름다운 것에만 둘러싸여 자라야 한다. 근래 기관 밖에서는 매주 흉흉한 일이 벌어진다. 그런 와중에 이 일을 ‘아담’이 직접 목격했다는 걸 기관에서 알게 된다면 외출이 아예 금지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치 않는 회상으로 눈을 감은 ‘아담’은 몸을 떨고 있다. 식은땀을 흘리며 간혹 숨을 잘못 들이키기도 한다. 보호인은 ‘아담’의 생체 신호를 살피지만, 주변 환경에는 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의 메커니즘에 따르면 이러한 자율신경계 증상은 접촉으로 해결된다. 접촉을 통해 체온은 상승하고 불안정한 전기신호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아담은 사회와 격리되어 자라나기에 가족도 부모도 친구도 없다. 연결도 결여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병통과 폐단은 사회에 있다. 이 사회는 사랑하기를 허락하지 않으며, 까닭은 ‘분열시켜 지배하라’는 어떤 격언처럼 그것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는 서로를 아낄 수 있는 형태에서 자꾸만 멀어진다.

 보호인은 단단한 팔로 ‘아담’을 끌어안는다. 말하는 것 또는 손을 잡는 것, 하다못해 입을 맞추는 것까지도 이제는 큰 효과가 없다. 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등을 토닥이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아담’의 거칠었던 호흡은 차츰 가라앉고, 제 몫을 다한 보호인은 ‘아담’의 잠에 침투한다. 감각, 정서, 사고, 행동. 전부 그에게는 금지된 것들이다.

 꿈을 점거한 그는 가장 안쪽 깊은 곳에 마취된 핵을 건드린다.

 

 여자가 되고 싶은 여자

 여자는 모두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 여자는 확실히 중독성이 있으니까. 여자의 머리카락, 눈썹, 손목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여자는 이런 여자가 외부로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자는 여자와 관계를 맺고, 그 안에 다른 것이 들어가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여자를 지키기 위해 철저한 검증을 거친 이들만 여자로 인정받는다. 여자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이들이 여자를 검열하고 기준을 세웠다. 

 

 꿈속, ‘아담’은 자신의 일생을 되짚어 돌아가는 중이다. 헤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곧 보호인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몸이 정말로 옆에 있는 건 아니지만 아담은 느낄 수 있다. 머뭇거리지 않고 걸음을 내딛다 보니 한 여자가 보인다. 아담은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는 또다시 막을 벗는다. 이상하리만치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의례와도 같은 그 동작을 끝까지 살피고 ‘아담’은 다시 걷는다. 푸르른 하늘과 뭉게구름 아래 사람들이 들판에 앉아 있다. 그들의 온기, 체취, 각기 독특한 음성, 어조, 손끝의 모양을 느낀다. 돌아보는 하나하나의 다른 얼굴과 이름들. 누구도 막을 입지 않았다. 아담은 놀라 눈을 뜬다. 수평선을 따라 길게 늘어진 노을이 하루가 저물었음을 알려준다. 너머로 기우는 태양의 뚜렷한 윤곽, 바람을 타고 소금 냄새가 흩어진다. 밝은 연둣빛이 눈에 띈다. 해 질 녘 해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색이다. 송곳니를 팔았던 그 여자다. 알게 된 순간, 내려다본 손안에는 그녀의 송곳니가 돌아와 있다.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몰려든 먹구름 속에선 번개가 친다. 가장 큰 날개를 가진 새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 그가 송곳니를 실어다 주길 바라며 바다를 향해 힘껏 던진다. 아담은 놀라 눈을 뜬다. 깜깜히 저문 밤하늘을 뒤로 빛나는 별들은 주단 위 수놓은 진주. 거세당한 줄로만 알았던 본능이 깨어난다. 북극성을 찾고 나면 시야가 차차 어두워진다(溶暗). 다른 아담을 서른세 번 찌른 여자가 바로 저 골목에 있다. 시선이 섞인다.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말 한마디 없이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의 생각을,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담은 놀라 눈을 뜬다.

 애처로이 가물고도 맹렬하게 갈라진 대지에서 분출된 용암과 함께 어머니 가이아의 진언이 들려온다.

 그것은 꿈이 아니다.

 ‘아담’은 놀라 눈을 뜬다. 


 ‘아담’은 단 한 번도 꿈을 꿔 본 적이 없다. 그에게 수면이란 지친 몸을 쉬게 하는 일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게다가 매일의 규칙적인 여섯 시간 동안 암전된 시야는 그 어떤 일도 꿈꿀 수 없게 만든다. 눈을 뜨고 있을 때조차 말이다. 그러나 넘칠 만치 취해 본 첫 숙면 속에서 아담은 새로운 세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보호인의 손을 잡고 함께하게 된 그곳은 눈비로 흐릿한 잿빛의 도시가 아닌 다채로운 대지였다. 마주 보고 웃는 사람들의 얼굴, 그들의 눈은 다른 모양으로 휘어지고 눈가의 주름은 또 다르게 잡힌다. 누군가는 웃을 때 패는 볼우물을 가졌고 누군가는 웃을 때 시원하게 드러나는 잇몸을 가졌다. 오히려 그 차이가 서로를 이해하게 했다. 정체를 규정하는 일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아담’은, 아담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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