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전시회를 다녀와서
갑자기 생긴 국군의 날 휴일에 오랜만에 서울나들이를 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2024.8.8~11.17)에 다녀왔다.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 22명의 작품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전에도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시에서 천경자의 그림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다른 여성 작가들과의 기획전으로 다시 보니 조금 다른 시각으로 다가왔다. 전시회 팸플릿과 홈페이지의 안내글을 토대로 전시 내용을 정리해 본다.
천경자(1924~2015)는 일제강점기에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옥자(玉子)이고, '경자'는 본인이 감성적인 느낌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외할아버지로부터 창과 천자문을 배우고, 매일 밤 <심청전>, <삼국지>, <춘향전>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서화를 배운 어머니를 닮아 천경자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정규 미술학교가 없던 조선을 떠나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집에서 미친 시늉까지 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 1941년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현 도쿄의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해 일본화를 전공한다. 어머니가 패물을 팔아 학비를 댔고, 아버지는 마작에 빠져 전답을 계속 팔아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를 지극히 아끼던 외할아버지는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다. 그녀는 1941년 여름방학에 집으로 돌아와 외할아버지를 대상으로 <조부상>을 그린다. 이 그림으로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다. 훗날 그녀는 이 작품을 "사실적이고 학생다운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천경자는 태평양전쟁으로 수업 연한이 단축되어 1943년 가을에 졸업하고, 1944년에 귀국한다. 귀국 시 우연히 만난 동경대학교 경제학과 유학생인 이형식의 도움으로 여객선 표를 구할 수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1945년 봄에 이형식과 결혼한다. 하지만, 이형식의 떠도는 생활로 신혼 초부터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학력과 집안 사정을 사실과 다르게 말하고 가장 역할을 하지 않은 이형식으로 인해 그녀는 모교에서 미술 교사를 한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혼자 아이를 키워나간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형식은 소식이 끊겼고, 여동생 옥희는 영양부족으로 폐병이 재발해 결국 사망한다. 그녀는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슬픈 시간을 견디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또한,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고, 전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판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그녀는 여성 화가로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지 못했고, 당장 먹고 살 게 없는데 작품을 판매할 기회를 남성 작가에게 빼앗겨 아이를 데리고 간 자리에서 통곡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녀는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고, 개인전을 축하하기 위해 학교에서 조촐하게 마련한 자리에 기자들을 초청했는데 여기에서 유부남인 김남중을 만난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김남중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게 되는데, 이후에 그와 재혼하여 아이도 낳지만 결국 이혼한다.
시대적 난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그림을 계속 그렸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녀의 초기작에는 뱀이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천경자는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속의 여자는 결국 그린 사람의 분신이고 꽃이니 뱀이니 머리에 얹은 것도 한이에요. 한이 많아서 머리에 뭘 이고 그러는 거죠. 근데 한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천경자는 1954년 홍익대학 미술대학 전임강사가 되었고, 다음 해 제7회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받는다. 연이어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다져나간다. 당시 화단은 한국 고유의 특성을 반영한 '한국화' 형성이 당면 과제였지만, 천경자는 자기 작품을 한국화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다. 채색화는 곧 일본화라는 편견으로 대부분 작가가 수묵화를 그릴 때도 꿋꿋하게 채색화 작업을 했다.
<옷감집 나들이>는 천경자가 홍익대학에 부임한 뒤 제작한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예민한 감각과 타고난 감수성을 지닌 그녀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아 포목점의 각종 비단 옷감의 무늬, 문양, 촉감을 좋아하여 어머니와 함께 포목점에 방문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청춘의 문>은 영화 <퀸 크리스티나>의 주인공 그레타 가르보를 그린 작품이다. 17세기 스웨덴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을 담고 있는 영화인데, 김남중을 만나 힘겨운 사랑을 이어나갔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게 아닌가 싶다.
천경자의 <꽃과 병사와 포성>이다. 처음에 이 그림을 봤을 때는 한국 전쟁을 겪은 작가가 전쟁의 참상을 그린 것인 줄 알았다. 작품에 대한 설명글을 읽어 보니 베트남 전쟁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1972년 문화공보부에서 미술계 현역 작가 10명을 베트남 전쟁에 보내 한국군의 활약상을 기록화로 그리게 했는데, 천경자는 유일한 여성 화가로 참여했다. 베트남에서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작업한 <꽃과 병사와 포성>과 <목적> 두 점의 기록화로 200만 원을 받았다. <꽃과 병사와 포성>은 국방부에 걸려 있는 작품인데,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것이라고 한다.
천경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1969년부터 유럽과 인도, 중남미, 아프리카, 미국 등 세계 곳곳에 스케치 여행을 자주 다니며, 자신만의 작품 스타일을 만들어 나간다. 세계 각지를 탐험한 천경자는 다양한 소재를 화려한 색채와 세밀한 기법으로 작품에 담아낸다. 기존의 구성과 색감에서 탈피하여 한층 독특하고 신비한 모습을 표현한다.
그녀의 작품 <초원>은 아프리카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코끼리 등 위에 나체로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천경자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미래의 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이에요. 그 속엔 내 슬픈 생애의 다면(多面)이 숨 쉬고 있어요."
<이탈리아 기행>은 1969년 천경자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 훗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에서 중세기의 그림을 만났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어요. 그 위대한 그림들 앞에서 나는 모든 덧없는 것들을 끊어 버리자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아프게 깨달았지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방대한 스케일, 털끝 하나도 놓치지 않은 정확한 데생을 보면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 이후 더욱 데생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고 그림이 더욱 세밀해졌지요. 〈이탈리아 기행〉(1971-1973) 등이 그 후의 작품인데 작품이 아주 세밀하잖아요?"
그녀는 이런 깨달음 뒤에 김남중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1971년 5월 라일락 꽃이 필 무렵, 그와 헤어진 뒤 작업에 더욱 매진한다.
천경자는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수필집을 출간한 수필가로서도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문학과 영화, 공연 등 전반적인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박경리, 박완서, 피천득, 고은 등 국내 문학인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1976년에 <문학사상>에 자서전을 연재하기 시작하고, 수필집을 출간한다.
그녀는 1991년 '미인도' 위작 논쟁으로 긴 시간 동안 상처를 받고 절필하여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한다. 이후 큰 딸이 있는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다. 1998년 잠시 귀국하여 서울시립미술관에 자신의 작품 93점과 화구 소장품을 기증하여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시실에서 천경자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를 건넬 때는 그림을 얼싸안으면서 "이 그림은 안 되는데..."라고 울먹일 정도로 그림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지고, 2015년 8월 6일, 91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별세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은 우향 박래현(1920~1976) 작가의 그림이다. 알고 보니 남편이 너무나도 유명한 운보 김기창 화백이다. 앞서 본 천경자 화가의 설명글에는 우향 박래현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이와 학년이 위이고, 그림도 잘 그리고 옷도 잘 입는 데다가 따로 유키 소메이에게 그림 사사를 받는 박래현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박래현은 1920년에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다. 딸이 귀한 집안이라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호남평야에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인 아버지가 직접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 5살 때 군산으로 이주한다. 그녀는 관립 경성 여자 사범학교에 다니며 미술 교사인 에구치 게이시로에게 동양화와 수채화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1934년 <조선 미전>에서 <만추>로, 1936년 <조선 미전>에서 <춘>으로 입선하고, 1938년과 1940년에 특선을 수상한다.
박래현은 순창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그만두고, 1940년 20살에 동경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부 사범과에 입학한다. 1941년 <조선 미전>에 작품을 제출하기 위해 귀국한 여름 어느 날, 박래현은 운보의 그림에 반해 작가가 보고 싶어 직접 집으로 찾아가 김기창과 처음 만난다. '우향'이라는 아호를 지어준 이도 김기창이다.
그녀는 1945년 귀국하여 김기창과 거의 매일 만나다가 1946년, 26세에 김기창과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청각장애가 있는 가난한 화가인 김기창과의 결혼에 반대한 박래현의 부모님은 결혼식장에도 오지 않았고, 운보는 부모님이 안 계셔서 친구들만 참석했다고 한다.
박래현의 <회고>는 1957년 제6회 국전에서 입선한 작품으로 한복 입은 여성들과 도자기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표현한 작품이다. 한국전쟁 당시 박래현은 미군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이어 나가다가, 군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는데 이때 새로운 동양화 연구에 몰두한다.
일본에서 큐비즘을 접한 박래현은 큐비즘 양식을 활용한 반추상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당시 사실적 표현에서 떠나 형태와 구성을 중심으로 하는 작풍으로 바뀌어 간 화풍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풍기는 색감과 분위기가 독특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겨 두었다.
박래현은 1956년 <국전>에서 <노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국전 초대작가가 된다. 1958년(38세) 경향신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렇게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요즘은 그렇게까지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림은 언제나 그림을 그리는 장소가 필요하고 분위기가 문제가 되어서요. 그리고 또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해요. 늘 애들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갖기가 힘들지만 대개 밤에 애들을 재워 놓고서 그린다든지 학교에 보내고 난 다음에나 내 일을 하게 되더군요."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집안일을 마친 밤에야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박래현은 잠자는 시간을 아깝다고 말했고, 남편 김기창 화백은 그런 아내를 '부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틈틈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부부전을 가졌다.
놀라운 점은 박래현이 청각장애로 대화를 못하는 운보에게 구화술을 익히게 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만들고, 발성을 연습시켜 어눌하지만 말하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했다고 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삼중 통역자라 칭했다. 미국을 여행하면서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뒤 이를 다시 구어로 옮겨 남편 김기창에게 설명했다. 영어와 한국어, 구어를 오가며 통역을 했다는 의미이다.
1964년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 가 판화를 연구하고, 동양화와 판화 전시를 많이 열었다. 그녀가 특히 주력했던 작업은 추상판화였다. 박래현 활발한 작품 활동에 몰두하지만, 1975년 간암이 발병하여 1976년에 56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이후 김기창은 박래현과 살았던 성북동 자택을 헐고 두 사람을 기념하는 <운향 미술관>을 건립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여류 화가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궤적을 보니 아무래도 가정에서의 역할과 화가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술가로서 평탄한 삶을 살아간 사람은 흔치 않지만 말이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고 다양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한 여성 작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고자 한 전시 의도는 상당히 의미 있었으나 큐레이션 부분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23명의 작가가 살아온 시대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미술제도가 작가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미술 전시와는 달리 전시실마다 벽면을 빽빽하게 가득 채운 안내글들이 비중을 꽤 많이 차지했다.
각 작가의 삶과 연보 외에도 사회와 미술 제도 등에 대한 자료 설명은 친절한 안내라고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분량이 많고 글씨가 작아서 벽에 바짝 다가가 허리를 구부려서야 겨우 읽을 수 있었다.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하여 가독성 있게 제시했다면 그림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를 통해 잘 몰랐던 여성 화가의 작품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뜻깊은 전시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