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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Mar 11. 2023

경고등


6시로 맞춰놓은 알람이 울렸다. ‘다시 알림’을 눌렀다. 10분뒤 알람이 다시 울렸다. ‘다시 알림’을 눌렀다. 다시 10분뒤 알람이 울렸다. ‘다시 알림’을 눌렀다. 잠은 이미 깼지만 눈을 감고 이불 속에서 자는 척을 했다. 금새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이차기 시작해서 10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일어났다. 화장대로 가서 2년전부터 복용중인 항우울제를 한 알 입에 넣고 밤새 마른 입안에 침을 모아 꿀꺽 삼켰다.

방학이라 아이들은 늦잠을 자게 내버려뒀다. 주방으로 가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노란 비닐로 낱개포장되어 있는 믹스커피를 탔다. 한 모금 마시고 세수, 한 모금 마시고 화장, 한 모금 마시고 옷을 골랐다. 커피를 다 마셔갈 즈음 출근준비도 거의 마무리되었다.

2월9일이었다. 1일부터 시작된 결산이 이제 마무리되었다. 결산이 마무리되고 나면 결산결과에 대한 보고, 예상대비 결과에 대한 차이분석, 미래 구간 개선 방안등의 보고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아침부터 머릿속이 복잡했다. 점검해야할 결산특이사항들, 요청받은 보고서들의 작업 순서를 머릿속으로 정리해가면서 출근을 하려고 차에 시동을 켰다.

차에 경고등이 켜졌다. 연료경고등, 타이어경고등 그리고 정기점검 경고등이었다. 연료경고등은 켜진지 이틀정도 되었나. 경고등이 켜지긴 했지만 아직 80킬로미터를 더 달릴 수 있다는 것도 같이 표시되었다. 경고등이 켜진 지 이틀이 지난 지금 내 차는 아직도 40킬로미터를 더 달릴 수 있다.(차에서 알려주는 정보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렇다.)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는 편도 10킬로미터.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하루에 왕복 20킬로미터를 이동해야하니 아직 이틀치의 여유가 있는 것이다. 출근을 하면서 주유소를 들를까 잠시 고민했지만 업무량이 많은 날이라 주유소를 지나쳐 회사로 곧장 갔다.

나는 경고등을 무시하다가 차가 멈추어버린 경험이 세 번 있다. 첫번째는 첫째가 유치원을 다니던 때였으니 5년전쯤이었나보다. 둘째 수인이를 어린이집, 첫째 민주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여의도 본사로 출장을 가던 길이었다. 출발하면서 연료경고등이 들어온 것을 알았지만 아이들 등원 후 출발하느라 다른 팀원들보다 늦어진 탓에 마음이 급했다.

‘경고등이 켜져도 50킬로미터는 갈 수 있으니 사무실까지는 갈 수 있겠지? 설마 가다가 차가 멈추기야 하겠어? 그냥 가보자.’

올림픽대로를 지날 즈음 차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엑셀을 밟아도 속도가 떨어졌다. 결국 차는 멈췄다. 겨울이라 시동과 함께 히터도 꺼져버렸다. 올림픽대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찬기 가득한 차 안에 앉아 보험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주유하는데 필요한 10분을 아끼려고 하다 결국 1시간은 더 늦어져 점심때가 되어서야 본사에 도착했다.

두 번째는 그 이듬해 봄 교육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차가 고속도로에서 멈춰버려 교육에 지각을 했고 사전테스트를 치르지 못해 혼자 저녁에 따로 시험을 치렀다.

세 번째는 퇴근길이었는데, 사무실에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다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이모님의 퇴근시간을 맞추려고 부랴부랴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경고등이 켜진 지 3일은 되었던 것 같다.

설마설마하며 내일, 또 내일로 미루었고 결국 대가를 치른 것이다. 경고등을 무시하다 차가 멈추어버리면 마치 내 자신이 멈추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에 경고등이 뜨면 잠시 멈추고 연료도 넣고 타이어에 공기압도 점검해야 한다.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차가 멈추어버린다. 아침에 차에 뜬 세 개의 경고등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경고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 부족 경고등, 애정 부족 경고등, 수다 부족 경고등, 칭찬 부족 경고등이 켜지면 잠시 멈추고 햇빛을 쬐어주고 사랑을 하고 수다를 떨고 칭찬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먹는 항우울제를 줄이고 끊어내는 시기도 더 당길 수 있을 것이다. 번아웃이 오기 전에 나를 돌볼 수도 있을 것이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회사에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를 하기 위해 식탁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앉았다. 노트북 앞에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푹 쉬어졌다.

“엄마, 혹시 기분나쁠지도 모르지만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

“응, 말해봐 뭔데?”

“엄마가 일하면서 한숨 쉬면 내가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걱정돼. 한숨 쉬는 것 좀 조심해줄 수 있을까?”

“엄마가 한숨을 쉬었니?”

“응.”

“그런줄도 몰랐네. 미안. 조심할께.”

수인아, 니가 내 경고등이구나. 노트북을 덮었다.

“수인아, 오늘은 일 그만해야겠다. 내일 하지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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