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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Jun 02. 2023

지우거나 채우거나

결산 마감 보고 메일을 보냈다. 엑셀로 만들어 둔 ‘업무리스트’ 파일을 열었다. 5월5일자 업무리스트 중 ‘결산마감보고’라고 적힌 칸에 짙은 회색으로 음영을 넣고 옆에 ‘F’라고 썼다. 업무리스트에 있는 세 줄 가운데 한 줄밖에 지우지 못했는데 벌써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날인 민주 생일 파티를 하루 먼저 하기로 해서 5시에는 나가야 했다.

‘후딱 한 줄만 더 지우고 가자. 마지막 한 줄은 저녁 먹고 집에 가서 지워야지.’

식당에서 생일 파티를 마치고 아이들은 아빠와 극장으로, 나는 집으로 갔다. 얼마 전에 개봉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세 장 예매해두었다고 했다. 혼자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 마시면서 노트북을 켰다. 마지막 세 번째 업무리스트를 지우고 잠시 한숨 돌리고 있자니 현관에서 아이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업무리스트를 다 지워냈다.

나는 엑셀로 업무리스트를 정리한다. 날짜와 내용, 요청자, 업무마감기한을 표시하고 진행상황을 메모한다. 완료한 업무는 짙은 회색으로 음영을 넣고 옆칸에 ‘Finish’의 약자인 ‘F’를 써둔다. 리스트는 매월 12일 경에 가장 길다. 4일경부터 조금씩 늘어나다가 10일경에 스무 개 정도가 된다. 업무들의 마감기한이 대부분 비슷하다. 전월의 결산이 마감되고 나면 본사에서부터 사업부까지 각종 부서에서 실적 마감 보고를 하게 되는데 내가 하는 일 중 대부분은 마감된 결산 결과를 분석하고 필요한 부서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엑셀 혹은 파워포인트형태로 각 부서의 요청 사항에 맞추어 정리하여 공유하는 일이다. 조직별로 마감 보고 일정이 대부분 비슷하다보니 요청 기한도 비슷한 것이다. 마치 그 날짜가 지나면 회사가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요청사항들을 대응하려면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체력에 지배받지 않도록 정신력을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한다.

금요일이었던 5월5일에 나는 업무리스트의 세 줄을 모두 지우고 편안히 주말을 보냈다. 월요일인 5월8일이 되자 업무리스트에 다섯 줄이 추가되었다. 두 줄을 지우고 퇴근했다. 9일에 다시 열 줄이 추가되었고 두 줄을 지웠다.

10일 출근을 했을 때 업무리스트는 열한 줄이었다. 오전에는 아이들 참관수업이 있었다. 열한 줄의 기한이 모두 11일과 12일이었다. 오늘 당장 처리해야하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참관수업은 10시부터였다. 사무실에서 학교까지는 차로 20분정도 거리이다. 9시반쯤 사무실에서 나왔다. 수인이, 민주의 참관수업을 차례대로 마치고 학교를 나오니 12시가 넘어 있었다. 집근처 햄버거 가게에 들러 세트메뉴를 포장했다. 회사 주차장에 주차를 해놓고서 햄버거를 먹어치웠다.

한 시가 넘어 사무실의 내 자리에 다시 앉았고 밤 11시가 되도록 한 줄 밖에 지우지 못했다.

 11일은 두 줄을 지우고 세 줄이 다시 추가되었다. 지우는 속도가 추가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리스트는 점점 길어졌다.

몇 일 연속으로 야근을 했더니 머릿속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체력에 정신력이 지배당하면 안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자고 다음 날 조금 일찍 업무를 시작하기로 했다.

12일은 새벽 3시에 업무를 시작했다. 6시정도에 하던 업무를 정리하고 출근준비를 했다. 작업을 마무리하지는 못해서 업무리스트는 아직 살아있었다. 여의도에서 회의가 있는 날이라 6시반정도에 차를 몰고 여의도로 출발했다. 8시정도 도착해서 마무리짓지 못한 업무를 이어 계속했다. 중간중간 오후에 있을 회의 자료 수정 요청이 와서 작업이 지연되었다. 점심도 거르고 계속 작업했지만 2시가 넘어서야 겨우 보고서를 팀장에게 보낼 수 있었다. 업무리스트에 짙은 회색 음영을 넣고 ‘F’라고 썼다.

회의를 마치니 4시. 동탄 집까지 막히지 않고 가려면 출발해야할 시간이었다. 막히기 시작하면 세시간도 각오해야한다. 후순위로 밀린 업무의 요청자들의 불만이 폭주했지만 아이들과 저녁을 같이 먹어야하는 날이라 외면하고 차를 몰았다. 집으로 돌아와 배달시킨 감자탕을 먹는 아이들 옆에 앉아서 정말 급해보이는 두건의 요청을 처리해주고는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결국 나는 12일 납기의 업무리스트를 다 지우지 못했다. 남은 리스트는 일정을 조율하고 주말로 납기를 미뤘고 특근을 신청했다.

밀려있던 대부분의 업무리스트를 주말 동안 지워냈다. 산책하기, 키즈카페가기, 청소하기, 빨래하기등 주말 동안 집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리스트들도 지워냈다. 어쨌든 이번 한 주도 아슬아슬, 무사히 업무리스트를 거의 다 지워냈다.

일요일 저녁을 거의 다 차리고 아이들을 불렀다. 수저를 놓고 있는 나를 보면서 민주가 말했다.

“엄마, 나는 계란말이라도 할께.”

평소에는 예쁘게 들렸을 그 말에 갑자기 화가 났다.

“그냥 먹자. 고기도 있고 된장도 있고 계란말이까지는 없어도 될 것 같은데?”

”계란말이 하고 싶은데…….”

“그냥 먹자고. 그냥 얼른 먹고 얼른 치우고 얼른 좀 쉬자. 엄마 너무 힘들다.”

다 지웠다고 생각하고 안심했는데 새로운 리스트가 보태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의 눈치를 살피는 민주의 눈치를 보면서 저녁을 먹고 치우고 침대에 누웠는데 눈물이 났다. 침대에 누워 왜 갑자기 화가 났는지,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지 생각했다.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시절부터 참 열심히 썼었다. 스티커를 붙이고 알록달록 색연필로 예쁘게 꾸미기도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짧게라도 하루를 남기려고 했었다. 다이어리에 적힌 계획들을 모두 마무리했을 때의 나를 상상하면서 미리 설레기도 했다. 꽉 찬 다이어리를 넘겨보면서 나도 꽉 채워진 것 같아 뿌듯했다.

내가 일년을 이렇게 열심히 살았구나. 이때는 여행을 갔었지. 이런 자격증도 땄었지. 맞아. 이 공연 참 좋았는데.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다. 대신 업무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나의 업무리스트에는 나의 필요에 의한 것은 없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꽉 차있다. 지난 업무리스트는 모두 짙은 회색에 ‘F’라고 표시되어있다. 나의 업무리스트는 내가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지워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다 지워내면 성공적으로 하루를 버텨낸 것이었고 그렇게 버텨낸 하루를 나는 짚은 회색 음영으로 지워버렸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상도 업무리스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생일을 축하하고, 주말에 산책을 하고, 함께 요리를 해서 저녁을 먹는 것들이 지워내야 하는 목록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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