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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Jan 02. 2023

부고

아침 7시.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잠이 덜 깬 상태로 핸드폰을 들었다. 밤사이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친한 지인의 빙부상 문자였다. 아직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자를 읽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이번에는 모친상 소식이었다. 조의금을 계좌이체하고 위로 문자를 보냈다.

 부고를 전하는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다르다. 남들에게 알릴 정신조차 없이 힘든 사람도 있고 전혀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지금 나에게 부고를 알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다가 나는 어땠나 생각했다. 2019년 말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휴가를 내기위해 회사에 부고를 전한 일이 있었다. 나는 덤덤했다. 그저 휴가를 내려고 알렸을 뿐이지 굳이 그것이 아니었다면 부고를 전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회사 외에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와 7살 유치원 입학때부터 29살까지 함께 살았다. 7살 이전에는 거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부모님이 경기도 광주에서 과수원을 하실 때였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고향인 대구에 살고 계셨는데 교육을 위해 우리 네 남매는 도시 할머니집으로 보내졌다. 내가 3살이 되던 해, 큰언니가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처음 혼자 할머니와 살기 시작했다. 큰언니와 세 살 터울인 둘째언니가 3년뒤에 대구로 갔다. 나는 언니들과 달리 유치원을 다니게 되면서 한 해 일찍 7살에, 마지막으로 나보다 세 살 어린 남동생이 내가 10살 되던 해에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큰언니와 남동생은 8년 터울이었으니 우리 넷은 그때 처음 한 집에 살게 된 셈이었다. 부모님이 아닌 할머니와.

 할머니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작지 않은 키에 깡마른 체구, 부리부리한 눈과 뽀글뽀글한 짧은 머리.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너무 많이 먹지 마라. 좀 씻어라. 옷을 깨끗이 입어라. 웃지 마라 바보 같아 보인다. 좀 웃어라. 너희는 애들이 왜 그렇게 말이 없냐. 이렇게 해도 혼나고 저렇게 해도 혼났다. 사과밭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옆에서 종알종알 수다쟁이였던 나와 내동생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언니나 동생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할머니가 보이면 멈추고 할머니가 없는 곳으로 피해 다녔다. 콩알만한 집에서 피해봤자 옆방이었지만 눈앞에 보이지만 않으면 마음이 조금 편했다.

 할머니는 큰언니와 남동생은 그나마 잘 챙겨주셨다. 큰언니는 혼자만의 책상도 따로 있었다. 책상의 책꽂이나 서랍에는 탐나는 물건들이 많았다. 언니가 입학할 때, 졸업할 때, 생일일때 등등 할머니나 고모가 선물로 주신 예쁜 필통, 필기구, 다이어리 특히나 카세트. 작은 언니의 책상을 빌려 썼던 나는 큰 언니가 너무 부러웠다. 언니가 없을 때 필통을 만져보기도 하고 카세트를 틀어보기도 했다. 밥을 먹을 때면 고기나 햄, 생선 같은 귀한 반찬들은 항상 큰언니와 동생 앞에 있었다. 처음에는 팔을 길게 뻗어서라도 먹었는데 조금씩 먹으라는 잔소리를 몇 번 듣고 나서는 내 밥그릇 옆에 있는 국물이나 떠먹고 말았다. 엄마가 오는 날은 잔칫날 같았다. 엄마는 먹고 싶은 반찬을 실컷 먹게 해주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하면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 전화 자주 하지마라.” 고 하셔서 전화도 몰래 해야 했다.

 집안이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였다. 할머니에게 우리를 맡겨 두고 경기도와 대구를 오가던 부모님이 과수원을 정리하고 내려오셨다. 내려오신 그날 작은 방에서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밤새 큰소리를 질러댔다. 엿듣지 않아도 훤히 들렸다.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의논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삼촌의 사업자금을 마련해준 모양이었다. 아파트는 내가 할머니댁으로 가기 얼마전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마련해준 것이었으나 명의가 할머니 앞으로 되어 있었다. 삼촌의 사업은 망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할 형편이 되어서야 털어놓으신 것이다. 그렇게 난리가 나고 아버지는 과수원을 정리하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대출을 갚는데 다 쓰셨다. 삼촌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날 이후 몇일 동안 계속 술을 드시고 할머니에게 퍼부어 댔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듣기만 하셨다. 그런 시간이 길진 않았다. 부모님은 금방 경주에 땅을 빌려 소작농을 시작하셨다. 우리는 아버지가 대출금을 갚아준 덕분에 아파트에 계속 할머니와 살았다.

 부모님이 경주로 가시고 할머니는 가끔 밤새 술을 드셨다. 아파트의 방 셋 중 제일 작은 방에서 혼자 멸치나 새우깡을 앞에 놓고 소주를 마시면 우리는 방에서 숨을 죽이고 누워 있었다. 밤새 통곡을 하시며 신세 한탄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10대일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자식은 원래 6명이었는데 한 명은 아주 어릴 때 아파서, 또 한 명은 오토바이 사고로 잃어 4명만 남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갑자기 가장이 되었다. 학교를 포기하고 남의 집 일을 도우며 돈을 벌었다. 과일 유통업 일을 어쩌다 배우게 되어 도매상을 차려 동생들을 대학도 보내고 혼수도 마련해주었다. 할머니는 젊을 적에는 작은 소일꺼리를 얻어와 보태셨지만 아버지가 돈을 꽤 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살림만 하셨다. 아빠없이 자란 자식들 안쓰러워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막내아들 사업자금을 대고 고모에게는 큰손주 통장을 털어 보태셨다. 그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손주 넷을 키우면서 가진 건 하나 없고 남편도 없는 할머니의 신세한탄. 밤새 그 통곡소리를 들으며 나는 얼른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빨리 학교가 가고 싶었다.

 자라면서 점점 할머니를 마주 볼 일이 없어졌다. 대학생이 되고 과외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할머니집은 그저 잠을 해결하는 곳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해에 취직을 했다. 근무지가 구미였다. 집 근처까지 셔틀버스가 있어서 1년정도는 집에서 출퇴근을 했다. 그러다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고 집에는 주말에만 들렀다. 회사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할머니를 완전히 떠나왔다. 29살때였다.

 그 사이 부모님은 경북 영양에 작은 사과 과수원을 사서 정착하셨다. 할머니는 대구가 직장인 둘째언니와 살다가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는 혼자 사셨다. 내가 결혼을 하면서 더욱더 할머니집에 갈 일이 줄어들었다. 명절이나 부모님을 볼 일이 있으면 영양으로 갔다. 한번씩 대구에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나 할머니집에 들렀다. 그렇게 일년에 한두번 보는 사이가 되었다. 갈 때마다 할머니는 한참동안 정치, 동네 사람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할머니의 통곡소리가 생각났다. 어릴 적에는 정을 주지 않았던 손녀. 손녀가 서른이 넘고 할머니는 여든이 넘었다. 싫은 내색하지 않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들었다. 일년에 한두번이니까.

 우리를 짐으로 생각하시던 할머니는 나이가 들고 병들어 자식들에게 짐이 되었다. 다른자식들은 저 살기 바빠 할머니를 외면했다. 아버지가 영양에 모셔가시기도 하고 대구에 같이 계시기도 하면서 돌보셨다. 아버지가 형편이 안되는 시기에는 요양원에 몇 달 계시기도 했다.

요양원에 면회를 간 적이 있다. 남녀의 구분도 없는 방안 여러 개의 침대 중 하나에 쪼글쪼글 뼈가 다 드러나는 얼굴로 할머니가 누워 계셨다. 요양을 하는 건지, 죽음을 기다리는 건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요양원과 대구집과 영양을 오가던 할머니는 2019년 치매까지 얻으셨고 그 해 12월24일 밤 11시에 혼자 병실에서 돌아가셨다.

사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10시간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의 4명의 자녀들, 엄마, 우리 네 남매의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의 병실에서 대기중이었다. 의사가 괜찮을 것 같으니 집에 가도 좋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밤에 혼자 돌아가셨다. 엄마는 나에게 25일 새벽 4시에 전화를 했다. 병원에서 우리집까지 3시간반 남짓. 또다시 그 길을 와야 하니 잠이라도 조금 자고 오라고 일부러 늦게 연락하셨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이것저것 생각나는데로 챙겨 이번에는 병원이 아닌 장례식장으로 갔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경조휴가를 좀 쓰겠습니다.” 팀장에게 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장례식장에 갔다. 무언가 몹시 슬퍼하고 우울해 있어야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삼촌과 고모들은 손님들 맞이로 바빴다. 장례식장은 하하호호 즐거웠다. 20년 넘게 아버지와 왕래를 하지 않았던 삼촌은 오랜만에 허락받은 자리라 즐거우셨는지 연신 싱글벙글하며 손님을 맞았다. 고종사촌동생들의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온다는 소식에 고모는 시어머니, 장모님이 될지도 모르는데 잘 보여야 한다며 머리에 고데기를 말았다. 우리가 빌린 호실은 삼촌, 고모들의 손님으로 꽉 차서 오래 계셔야하는 친척분들에게는 옆호실을 추가로 빌려 계시게 했다. 우리 네 남매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날랐다.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은 아버지만 지키고 있었다. 몇해 전 경운기 사고로 어깨와 허리가 불편하신 아버지는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혼자 누워있었다. 조문객이 오면 삼촌, 고모들이 잠깐 왔다 갔다. 절을 하려고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아버지의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은 찌푸려졌다. 팔로 바닥을 짚지 않고는 혼자 일어서기도 힘들어하셨다. 그러고보니 아버지의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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